별이 된 쿠튀리에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위베르 드 지방시가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지방시,위베르드지방시,별세,쿠튀리에,디자이너,패션,엘르,elle.co.kr:: | 지방시,위베르드지방시,별세,쿠튀리에,디자이너

1969년 11월, 파리의 집에서 만난 지방시가 피카소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우아함’이란 위베르 드 지방시를 위해 만들어진 단어처럼 느껴진다. 만약 그가 자신의 91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다시 우리 곁에 온다면 언제나처럼 근사하고 세련된 옷차림으로 나타날 거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아함의 정수를 잃지 않았다. 그의 타계 소식은 오랜 동반자이자 쿠튀리에인 필립 브네(Philippe Venet)에 의해 전해졌다. 지난해 6월, 국제레이스패션 박물관(La Cite de la Dentelle et de la Mode de Calais)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선보인 컬렉션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방시는 패션계를 떠난 후에도 유럽의 여타 갤러리와 작업을 지속하며 자신의 패션 철학과 비전을 끊임없이 공유했다.그의 시작은 패션이 아니었다 지방시는 두 살 무렵 아버지와 이별했다. 프랑스 보베(Beauvais)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법학을 전공하는 동시에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 -Arts)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했지만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를 만난 후 자신의 미래를 새롭게 꿈꾸는 계기를 맞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패션을 공부하며 자크 파트, 로베르 피게에서 경력을 쌓은 뒤 엘사 스키아파렐리 쿠튀르 스튜디오에서 견습생으로 내공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내건 패션 하우스 지방시를 설립했다. <엘르>, 지방시를 발견하다 <엘르>를 창간한 헬렌 라자레프(Helene Lazareff)는 젊은 디자이너 지방시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처음 디자인을 시작했을 땐 소재와 패턴이 상이한 블라우스와 스커트, 팬츠 등을 만들어 믹스매치할 수 있도록 했죠. 영어로 ‘세퍼레이트 룩’이라고도 말합니다. 이후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민하던 제게 헬렌은 많은 도움을 준 조력자와 여느 쿠튀리에처럼 완전한 풀 룩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값비싼 재료 대신 저렴한 소재를 활용해 이것저것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세퍼레이트 룩만큼 성공적이지 않을지라도 도전을 계속 이어갔죠.” 이처럼 시대를 앞서간 그는 50년대 프랑스 패션계에 기성복을 정착시킨 인물이다(미국에서 먼저 시작된 기성복 스타일은 이후 프랑스에서 ‘프레타 포르테’란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지방시의 첫 데뷔 컬렉션에 오른 모델 베티나 그라지아니(Bettina Graziani)의 이름을 붙인 ‘베티나 블라우스’는 그가 추구하는 고전미와 유머러스함을 동시에 지닌 아이코닉한 아이템 중 하나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엘르>는 젊은 디자이너 지방시가 지닌 유쾌함을 담기 위해 두 장의 화보 페이지를 기꺼이 할애했다. 1953년 프랑스 <엘르> 커버를 장식한 지방시 오트 쿠튀르 드레스를 입은 캐푸시느.  <엘르> 커버에 담긴 지방시의 우아한 패션.발렌시아가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한 화이트 코트가 1975년 <엘르> 프랑스 1월호 화보에 실렸다.멘토,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그는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인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자신의 절대적 영감의 원천이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53년 뉴욕에서 처음 만났다. “발렌시아가의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죠.” 단순함의 미학과 소재에 대해 깊은 조예를 지닌 발렌시아가는 지방시의 오랜 우상이자 스승, 평생지기였다. 1972년, 발렌시아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20년간 돈독한 우정을 나눴다. 뮤즈, 오드리 헵번 사실, 영화 <사브리나>로 시작된 둘의 첫 만남에는 오해가 있었다. 지방시는 자신이 제작할 영화의상의 주인공이 캐서린 헵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정작 스튜디오를 찾아온 배우가 오드리 헵번이었던 것이다. “지방시의 의상은 나 스스로를 느끼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의 뮤즈이자 영원한 친구인 오드리 헵번은 지방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의 긴밀한 관계는 가장 완벽한 디자인으로 꼽히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은 리틀 블랙 드레스를 통해 탄생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방시는 늘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종종 내게 말했죠. ‘나를 사랑한다고 당신이 말해주길 바라요. 그러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게요’라고 말이죠. 우리 사이엔 특별한 연금술 같은 무언가가 존재했어요.” 하우스의 모델이었던 베티나 그라지아니가 1952년 <엘르> 프랑스 2월호에 화보 모델로 등장했다.신사의 품격이 느껴지는 단정한 수트 차림의 지방시.패션의 선구자 그의 선구자적 기질은 오늘날까지 지방시를 있게 한 중요한 요소이다. 지방시는 다양한 국적의 모델과 작업한 최초의 디자이너였다. 1986년, 그의 작업실은 매력적인 흑인 모델들로 가득 찼다. “그녀들은 정말 아름다워요. 한번은 콩코르드 광장에서 이상형에 완벽히 부합하는 흑인 모델을 발견했어요. 바로 달려가 쇼의 모델로 서달라고 제안했죠. 그녀가 바로 모델 무니아(Mounia)입니다.” 디자이너 클레어 웨이트 켈러를 낙점하다 “내가 떠난 이후 지방시를 이끈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한껏 보여줬고 모두 혁신적이었습니다. 패션 하우스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문을 여는 가장 좋은 방법이죠. 헤리티지를 간과할 거라면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는 게 옳죠.” 그는 지금까지 지방시의 후임 디자이너들과의 만남을 사양해 왔다. 처음으로 성사된 만남의 주인공은 현재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클레어 웨이트 켈러다. 엄청난 기대 속에서 컬렉션을 치른 그녀는 놀라운 쿠튀르 피스들을 선보이며 새로운 지방시의 탄생을 증명했다. 지방시가 세상을 떠난 지난 3월 10일, 클레어는 그를 추모하며 이렇게 말했다. “무슈 지방시는 이 시대의 진정한 신사였어요.” 더없이 아름다운 삶 그는 파리의 집과 수많은 예술 작품들로 가득한 외르에루아르(Eure-et-Loir) 주에 있는 저택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브랜드를 떠난 후에도 무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바쁘고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요.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지식과 방식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죠.” 살아 있는 전설이었던 위대한 쿠튀리에 지방시는 현재, 이별을 고하고 패션의 전설로 기록됐다. 하지만 그가 창조해 낸 스타일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계승될 것이 분명하다. 그는 아마도, 먼저 도착한 그곳에서 오랜 친구인 헵번을 만나 그녀를 위해 옷을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