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마. 내가 잘 볼게.” 동생 부부는 내 말을 믿었을까. 그냥 믿고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을까. 그들이 외출하는 동안 귀한 딸, 그러니까 15개월 된 조카를 봐주기로 한 날이었다. 참고로 나는 남자이며 결혼을 했지만 아이는 아직 없다. 아차, 말을 다시 해야겠다. 결혼은 했고 아이는 없다. 결혼했다고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어쨌든 ‘육아 스펙’은 제로이고 부성애를 느껴본 적도 없는 데다 누구의 도움 없이 아이를 보는 상황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을까. 아이와 함께 있다고 해서 아이를 잘 보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 보기만 하는 걸 의미하지도 않는다는 걸. 아이를 본다는 건 먹여주고 놀아주고 재워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아이와 나, 둘뿐인 공간에서는 시시각각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예를 들어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에 장난감만 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금세 싫증이 났다. 지겨움을 느낀 건 조카가 아니라 나였다. 노래가 나오고 불빛이 반짝이는 장난감 건반과 블록 장난감이 30대 남성을 사로잡을 리 없었다. 어느새 나는 방대하고 놀랍고 흥미로운 일들로 가득 찬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참, 조카를 봐야 하지. 고개를 들어보니 조카는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대신 화분의 흙을 고르고 있었다. 흙투성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5개월 된 조카가 말을 할 리 없으니.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했다.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작은 존재 안에 내재된 감정과 욕구를 알아채야 했다. 문득 “엄마니까 네 맘 다 알아”라는 엄마 레퍼토리가 진짜구나 싶었다. 비록 베이비시터 임무였지만 화장실도 편히 못 가는 상황과 무수한 감정노동 탓에 어느덧 몸과 마음이 나가떨어졌다. 동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제 와?’ 비겁하고 치졸한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조카에게 ‘먹을 거 잘 주는 착한 큰아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아이 보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우리 남편하고 똑같네. 놀아주는 게 다가 아니라니까.” “애 보는 것만 힘든 게 아냐. 살림도 같이 한다고 생각해 봐.” 진땀을 뺀 사연을 들은 또래 엄마들이 리뷰를 달았다. 그 말들에 100% 동의했다. 육아 노동과 가사는 외롭고 고되지만 아무리 잘해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들의 고충도 자연스럽게 이해됐다. 주말에 출근한 동료 에디터가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일하는 모습에 문화적 충격과 연민이 발동한 적 있었다. 그때 그 깊은 속사정과 고된 일상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고생하네요”라고 한마디 해줄걸. 그나마 다행이라면 육아를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지 않는 사회적·개인적 인식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빠가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하루 5시간에 달하고, 남성 직장인들의 절반 가량이 육아 휴직을 쓰는 스웨덴이나 남자들이 여성과 동등한 육아 지원 혜택을 요구하기 시작한 프랑스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아빠의 육아 참여를 장려하기 위한 몇 가지 그럴듯한 제도들이 추진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육아 휴직자 중 남성 비율이 처음으로 10%를 넘어섰다. 미미한 숫자이지만 아빠와 아이의 교감 시간이 하루 평균 10분도 안 된다는 통계를 감안하면 의미 있는 행보다. 나중에 아이가 컸을 때 엄마의 도우미인 줄 알았던 남자가 “내가 네 아빠다”라고 말하며 스타워즈급 반전을 일으키는 상황이 그만큼 줄었단 얘기다. 아기용품 진열대의 라벨은 여전히 엄마와 아이 사진으로 도배돼 있어도 육아 커뮤니티에선 기저귀에 대해 여자만큼 말을 잘하는 ‘워킹대디’들과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는 ‘육아빠’들의 사연을 적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아이는 둘이서 키워야 한다, 여자가 엄마가 되는 순간 희생을 강요하는 건 부당하다, 육아도 가족을 지키는 일이다, 남자도 육아를 통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 등등 아름답고 뭉클한 생각을 가진 남자들이 이렇게나 많다. 그래서 당부 드린다. 만약 공원이나 카페, 수영장에서 육아와 씨름하고 있는 남자를 보면 “남자가 잘 보겠어?” “애 엄마는 뭐 하고?” “사회생활은 어쩌고?”라는 부질없는 간섭은 접어두길. 육체적·정신적 피로감보다 그들을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건 남자의 육아를 상식에서 벗어난 노동으로 바라보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최근 공개된 픽사의 신작 <인크레더블 2>의 예고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제대로만 하면 육아도 영웅적인 일이야.” 슈퍼 히어로 아내가 세상을 구하는 동안 3남매의 육아를 맡아 허덕이는 주인공 아빠를 위한 조언이다. 밖에서 일하는 게 가족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라 여겼던 아빠들이 가족을 지키는 또 다른 방법을 깨닫기 시작했다. 육아에 뛰어든 그들이 서툴고 결핍투성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다 보면 혼란이 질서가 되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여자가 엄마로 거듭나듯이. 그러니까 어린 조카 돌보느라 쩔쩔맨 나한테도 뭐라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