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가 피어나는 집 | 엘르코리아 (ELLE KOREA)

그래픽 디자이너 필리프 아펠루아는 집에서 일하기를 좋아한다::필리프 아펠루아,디자이너,그래픽디자이너,인테리어,하우스,포스터,디자인,타이포,엘르,elle.co.kr:: | 필리프 아펠루아,디자이너,그래픽디자이너,인테리어,하우스

필리프 아펠루아가 디자인한 세 개의 포스터 컬렉션. (왼쪽부터) 액상프로방스에서 열린 북 페어 포스터(2012), 콩플랑 생토노린 뮤지엄 엑스포 포스터(2013), 툴루즈 국립극단 포스터(2015~2016 시즌). 탁자 위의 나무 조명은 타프 아키텍츠(Taf Architects)가 디자인한 제품으로 Muuto.사생활과 작업공간을 넘나드는 구조. 벽에 걸려 있는 포스터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열린 <시카고> 전시 포스터(1987)와 <아브르 Le Havre> 포스터(2006). 문 밖 거실에 걸린 것은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뮤지엄에서 열린 그의 대규모 회고전 <Using Type> 포스터(2015).필리프 아펠루아(Philippe Apeloig)는 세계에서 가장 명망 높은 그래픽 아티스트 중 하나다. 오르세 미술관과 루브르박물관의 디자인 컨설턴트라는 이력이나 에르메스와 다양한 협업을 했다는 사실은 모르더라도 프랑스인들은 물론 우리 모두 그의 작업을 보고 탄복한 경험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2차원의 세계에서 필리프 아펠루아는 글씨의 배열이나 컬러, 구성과 감각, 전달하는 메시지의 힘까지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3차원과 만나면? 그의 집을 레너베이션한 건축가 실뱅 뒤뷔송(Sylvain Dubuisson)에 따르면 “필리프는 패닉 상태가 된다.” 실존하는 공간에서 방 사이즈나 가구 배치 같은 건 그의 영역 밖이다. 잘 못하는 건 빠르게 인정할 줄 아는 필리프는 건축가에게 아예 집 열쇠를 넘겨줬다. 그러면서 부탁한 단 한 가지는 ‘정리’. 그간 디자인한 포스터 컬렉션을 정리해 달라는 거였다. 그의 커리어만큼 긴 세월 동안 모인 포스터들이 그저 쌓여만 있다가 이젠 자신들을 작품답게 대우(?)해 달라는 듯 필리프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크래프트 종이 롤과 액자 역시 고대 신전의 탑처럼 높게 쌓인 책들 사이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작품 안에서는 여백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그인데, 막상 자신의 아카이브는 물건이 넘쳐나도 주체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해 필리프도 나름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작업할 때 주로 쓰는 기술인 ‘분산’은 공간에서 시도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이상해졌다. 해결사로 나선 건축가 실뱅 뒤뷔송은 필리프의 작업을 공간에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 종이처럼 연약한 소재들을 선택했다. “두꺼운 판지와 포플러 합판을 사용했어요. 보통 성냥이나 치즈 상자를 만들 때 사용하는 소재죠.” 혼자는 약하지만 중첩할 수 있고 또 가벼운 장점을 지닌 소재를 이용해 실뱅은 비행기 날개 속과 유사한 벌집 구조의 패널을 만들었다. 포스터를 정리하는 선반 위에는 단단한 판지로 만든 대형 작업 테이블을 올려놨다. 이렇게 완성된 수납장 겸 작업 테이블은 주거 공간인 아래층에 하나, 아틀리에 위층에 하나를 놓았다. 위층의 아틀리에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있기에 그들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반영해 사이즈와 공간 구성을 정했다. “벽에 고정시킨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일 이사한다고 해도 모든 걸 가져갈 수 있죠. 언제든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듈 형식이어서 경제적이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합니다.” 실뱅이 설명한다. 필리프는 동료들과 떨어져 혼자 쉴 수 있는 작은 공간도 갖고 싶어 했다. 포부르 생 앙투안 근교에서 가구를 만드는 필리프의 할아버지가 그에게 선물한 서랍장만 잊지 말고 놓아달라는 게 유일한 부탁이었다. “우린 두 개의 서랍장을 놓고 거기에 어울릴 만한 작은 조명을 달았어요. 라디에이터를 가릴 만한 그릴은 필리프에게 직접 디자인해 달라고 부탁했죠. 주인의 스타일이 나올 것 같았고, 또 그가 디자이너니까요! 그는 정말 놀랍게도 완전히 쓸모없는 디자인을 해줬어요. 그래픽 디자이너 특유의 2D 세계관을 반영한 디자인이었죠(웃음). 그러나 충분히 매력적이었어요.”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 집의 모든 것은 보통 사람이 누구나 좋아할 디자인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오직 한 사람, 필리프 아펠루아에게는 세상 어디보다 자신답고 편안한 곳이 됐다. 실뱅은 프랑스인답게 이 집을 와인 저장고에 비유했다. “좋은 와인처럼 시간이 지나 필리프의 아카이브가 쌓여갈수록 더 훌륭하고 풍성해질 겁니다.”  열정적이고 강박적인 독서광이기도 한 필리프를 위해 실뱅은 서재에 커다란 이동식 테이블을 만들었다. 보관 중인 포스터를 펼쳐놓을 수도,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을 수도 있도록 했다. 상판 아래 수납공간은 포스터를 둘둘 말아 넣기에 적당한 사이즈로 제작했다. 벽에는 그랑 팔레에서 열린 에르메스 전시 <Le Saut Hermes>(2013)를 위해 디자인한 포스터가 걸려 있다.이 집의 중심인 부엌은 건축가 이브 크뇌제(Yves Kneuse)가 디자인했다. 와인 저장고의 느낌이 나는 아카이브 룸과 연결되는 공간. 빈티지 의자는 어느 시골 병원 대기실에서 사용하던 것을 공수해 왔다. 상자 형태의 선반에는 액상프로방스에 있는 아틀리에 뷔필(Atelier Buffile)에서 만든 그릇들을 올려놓았다.가구 장인인 필리프 아펠루아의 할아버지 사뮈엘 로젠베르그가 만든 서랍장. 위에 걸린 포스터는 런던 디자인 미술관에서 그래픽 디자인계의 대가 빔 크라우벨(Wim Crouwel) 회고전이 열렸을 때 디자인한 것(2011). 필리프는 빔 크로우벨이 설립한 토털 디자인에서 실습생으로 지낸 바 있다. 서랍장 위에 놓은 사진은 그 시절 네덜란드 안무가이자 포토그래퍼인 한스 판 마넌이 찍어준 사진(1985).필리프 아펠루아가 2017년에 세브르 국립도자박물관과 협업해 선보인 도자기 접시 세트 ‘디안(Diane)’. 구두점이 축적되는 형태에서 모티프를 얻어 디자인했다. 파리 세브르 갤러리에서 판매한다.작은 벽감(벽면을 우묵하게 파서 만든 공간) 안 선반 위에 필리프가 작업한 몇 권의 책이 놓여 있다. 맨 앞에 둔 것은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그의 삶을 성찰한 <Chroniques Graphiques>.실뱅 뒤뷔송이 판지로 만든 가구로 다시 꾸민 사무실. 벌집 구조로 된 큰 패널을 포플러 합판으로 만든 받침대 위에 올렸다. 옷장은 바닥에서 띄워 벽에 고정시켰다. 콘스탄틴 그리치치가 디자인한 ‘올스타’ 암체어는 Vitra. 책상 조명은 Jiel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