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작품상 수상은 말할 것도 없고, <더 사일런트 차일드>로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레이첼 셴턴의 수화 수상소감 역시 오래 기억될 듯하다. 지난해 여우주연상 수상자 엠마 스톤이 남성 중심의 오스카 후보 지명을 비판하는 의미를 담아 “네 명의 남자 감독과 그레타 거윅”으로 감독상 후보를 호명한 짜릿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여우주연상 수상자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수상소감이야말로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였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감사의 말을 끝낸 뒤, 오스카 트로피를 바닥에 내려놓고 “오늘 후보로 참석한 모든 여성”을 일으켜 세웠다. 배우나 감독부터 촬영감독, 음악감독, 디자이너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의 후보에 올랐던 여성들은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맥도먼드는 “이 여성들 모두 해야만 하는 이야기와 투자를 받을 만한 계획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선언은 미투(#MeToo)와 타임스업(#TimesUp) 흐름 안에 있는 할리우드의 현재인 동시에 더 많은 여성과 소수자 고용의 필요성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여성들이 해야만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함께 서 있던 여성들로부터 이미 시작됐다. 시상식 후보작 중에 모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많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여성이 엄마는 아니겠지만, 모두 엄마의 딸이기 때문이다. 맥도먼드의 수상소감 당시 서로를 안고 있었던 두 배우는 바로 <아이, 토냐>에서 토냐 역을 맡아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마고 로비와 토냐의 엄마 라보나 골든 역할을 맡아 여우조연상을 받은 앨리슨 제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이 모녀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다. 키 큰 여인이 세 살배기 딸의 손을 잡고 담배를 피우며 빙판 위에 서 있다. 딸의 나이가 너무 어려 팀에 받아줄 수 없다는 코치의 말에 그는 비웃음을 띠며 딸에게 명령한다. “가봐.” 이 장면은 두 사람 사이의 재앙을 암시한다. 딸의 재능을 이용하려는 강압적인 엄마와 그 아래서 오직 스케이팅밖에 모르는 소녀로 자란 토냐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모녀 관계나 악녀 탄생기를 벗어나 있다. 엄마 라보나는 자신의 폭력적인 행동은 딸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항변하지만, 돈 때문에 딸의 고백을 녹음해 팔려는 장면에서 엄마의 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라보나는 딸을 사랑하기는 했을까? <아이, 토냐>는 스포츠를 비롯한 재능을 가진 한 인간의 성장사에 부모의 희생이 있기를 바라는 대중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한다. 특히 이기적이고 괴팍한 엄마로 캐리커처화되지 않고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의 면모를 드러낸 앨리슨 제니의 연기는 그를 코미디 배우로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강렬한 펀치가 됐을 법하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에게 수많은 트로피를 안겨준 <쓰리 빌보드>는 딸을 잃은 한 엄마의 이야기다. 강간 후 살해라는 끔찍한 범죄로 목숨을 잃은 딸의 범인이 잡히지 않자, 밀드레드 헤이즈는 버려져 있던 세 개의 광고판에 단 석 줄의 광고를 싣는다. “내 딸이 강간 후 살해당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경찰서장?” 이 광고로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이 뒤집어지지만 밀드레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심지어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는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품을 가진 사람이며, 암 투병 중이다. 하지만 밀드레드는 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겠다는 의지로, 세상의 시선에 흔들림 없이 분노를 동력으로 삼아 돌진한다. 당신은 이런 엄마를 본 적 있는가? 울면서 연민에 호소하지도 않고, 자신을 비난하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고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차버릴 수 있는 엄마. 영화 속에서 밀드레드와 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힌트는 거의 없다. 단 한 번 등장하는 회상 장면에서 두 사람은 옷차림처럼 소소한 문제로 다투며, 서로를 살갑지 않게 대할 뿐이다. 그럼에도 <쓰리 빌보드>는 분명 여성 그리고 모녀에 대한 이야기다. 맥도먼드는 마을 사람들의 비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다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딸의 죽음에 고통받는 밀드레드를 화면 밖에 존재하는 인물로 연기해 냈다.그리고 또 하나,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모녀 관계에 대한 영화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작품이 있다. 바로 배우 그레타 거윅의 감독 데뷔작 <레이디 버드>다. “나는 그 어떤 여자도 엄마나 딸처럼 단순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를 본 적 없다.” <레이디 버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절대 단순할 수 없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찬란한 햇살이 어쩐지 지루하게 느껴지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고등학생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 부른다. 엄마 매리언(로리 멧칼프)은 딸이 지역 대학교에 진학해 평탄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무조건 뉴욕으로 떠날 생각이다. 영화 시작부터 등장하는 이 갈등은 이야기의 끝까지 이어진다. 레이디 버드가 첫 연애를 하고 또 섹스를 하며 삶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성장통을 겪는 와중에도 모녀는 계속 부딪친다. 조금만 더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좋아해 달라는 레이디 버드의 외침은 수많은 딸이 10대 시절에 엄마에게 했던 말과 같을 것이다. 그레타 거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 속에 풀어내는 것으로,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고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결국 모든 여성, 즉 모녀관계에 집중한 영화의 교훈은 하나로 귀결된다. 여성은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어떤 엄마여도, 어떤 딸이어도, 어떤 여자여도 괜찮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 역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이를 경험하고 증명한 훌륭한 여성 배우들이 다시 남성 배우들의 들러리가 되거나 어떤 남자의 엄마와 연인, 딸로만 존재하는 이야기로 돌아갈 리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영화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좀 더 좋은 영화를 더 많이 보게 된다. 윤이나 작가. 책 <미쓰윤의 알바일지>, JTBC 웹드라마 <알 수도 있는 사람>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