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핑크 물결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지난해 1월, 미국 전역에 핑크색 물결을 일으켰던 '여성들의 행진'. 정확히 1년이 지나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두 번째 발걸음을 뗐다::핑크,핑크물결,여성들의행진,여성운동,페미니즘,평등,우먼스마치,멜버른,MeToo,TimesUP,엘르,elle.co.kr:: | 핑크,핑크물결,여성들의행진,여성운동,페미니즘

1월 21일 멜버른. 예보된 날씨는 이따금 흐림이었다. 최고온도 28℃ 정도로 무난한 멜버른의 여름 날씨일 것으로 예상됐다. ‘부서지지 않는(Unbroken)’이라는 슬로건 아래 멜버른의 여성들이 모일 ‘우먼스 마치’의 개최 당일 아침, 예상은 정확하게 빗나갔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비가 내려도 행진을 진행할까. 하지만 행사가 시작되기 15분 전, 행진 시작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염려가 무색하게도 날씨가 말끔하게 개어 있었다. 우산을 접어 터는 사람들 위로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행사는 바로 이 이야기와 함께 시작됐다. “멜버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비를 맞으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다들 아시죠? 5분 안에 날씨가 또 바뀔 거라는 걸. 그래도 우리는 여기에 있을 거예요.” 말 그대로였다.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고 변덕스러운 그늘과 햇살이 오가는 광장에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여성이었지만 가족이나 연인, 지인과 함께 온 남자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그곳에 모인 이들의 연령대였다. ‘걸 파워’ 티셔츠를 입고 유모차에 탄 아기부터 직접 쓴 피켓을 들고 온 노년층 여성까지 어느 한 세대에 치우치지 않았다. 유색 인종도 적지 않아 호주 내에서도 다양한 인종 구성을 자랑하는 멜버른다운 풍경이 연출됐다. 본격적인 연설자 발언에 앞서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여성들을 만났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가장 단순한 것이었다. 변화무쌍한 날씨의 일요일 아침, 여기에 모인 이유는 무엇일까? 멜버른의 여성들은 호주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여성 이슈가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소녀들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적힌 원더우먼 티셔츠를 입은 메건이 말했다. “일상적인 성추행과 가정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수의 여성이 그들의 파트너에 의해 살해되고, 폭력에 노출돼 있습니다.” 멜버른이 속한 빅토리아 주의 아동보호단체인 ‘베리 스트리트(Berry Street)’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호주 내 가정 폭력은 지난 3년 사이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여왔다. 한 주에 1명 이상의 여성이 그들의 파트너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통계 역시 지난해 1주에 2명으로 수정됐다. 특히 지난해 10월 전 남편과 남자친구에 의해 여성들이 살해된 사건이 연이어 보도되면서 호주인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시드니에서 한국인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투신 자살 소동을 벌이다 체포된 한국인 서 모씨의 사건 역시 이 일련의 충격에 포함된다. 페미니즘과 관련해 해시태그를 직접 써넣은 티셔츠를 입은 재스에게는 동일 임금이 중요한 이슈였다. “가정을 돌봐야 하는 이중 부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업무에서 더 나은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습니다. 그런데도 남자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고 있어요.” 2017년 기준, 호주 여성들은 동일한 시간 동안 동일한 노동을 한 남성에 비해 15.3%나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 “남자들은 성공한 여성들은 다르다지만 그들 역시 마찬가지에요. 게다가 여성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의 말대로 대표직 이상의 남녀 임금 격차는 평균치보다 더 많은 21.6%로 벌어진다. 대외적으로 성공한 리더 직위의 여성 또한 임금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참고로 한국 대졸 여성 기준 임금은 동일 조건의 남성 대비 70.9%다. 이들과의 대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가부장제(Patriarchy)’라는 단어였다. 일반적으로 호주를 포함한 서양 문화권을 가부장제 사회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그래서 질문을 이어갔다. “당신은 호주가 가부장제 사회라고 생각하나요?” 호주 여성들은 “의심할 바 없는 가부장제 사회”라고 답했다. 호주 여성들은 가정과 일터, 길거리 등 어디에서나 성희롱과 성추행에 노출돼 있으며, 인종 차별과 성차별 문제는 여전히 호주 사회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돼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함께 이야기한 여성들은 내게 한국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한국은 어떤가요? 한국도 가부장제 사회인가요?” 당연히 내 대답도 그들과 같았다. “호주와 똑같거나, 아마도 더 심하겠죠.” 곧 연설이 시작된다는 진행자의 말에 사람들은 잔디밭 안쪽으로 서로 더 가깝게 모였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곳에 모여 있다는 실감이 났다. 행진 시작점인 알렉산드라 광장은 1주일 전, 멜버른의 가장 큰 퀴어 축제인 ‘미드섬마 페스티벌(Midsumma Festival)’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지난 연말 국민투표를 통해 세계에서 26번째로 동성혼 합법화를 이뤄낸 국가답게, 성소수자에 대한 언급과 성소수자 차별 반대 메시지 역시 발언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동성혼 합법화를 다시 한 번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내 앞에 있던 레즈비언 커플을 향한 박수가 쏟아졌다. 유모차에 앉아 있는 딸과 함께 행진에 참여한, 세 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완벽한 가족이었다.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MeToo’와 ‘#TimesUP’ 해시태그는 멜버른 우먼스 마치에도 당연히 등장했다. 진행자는 “오늘, 멜버른의 우리를 호주의 다른 도시, 이 움직임을 시작한 미국 그리고 세계의 다른 도시와 잇는 것은 바로 인터넷”이라고 말하며 “스마트폰은 우리의 무기”라고 선언했다. 전 세계적으로 활발해지고 있는 페미니즘 움직임과 여성들의 연대는 우리가 늘 들고 다니는 작은 기계로 더 멀리, 더 크게 퍼져 나가고 있다. 본격적인 행진에 앞서 하늘색, 파란색, 보라색의 천을 이어 만든 긴 끈에 맞춰 줄을 섰다. 그 끈을 잡고 일렬로 행진하면서 다리를 건너고, 시민들과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페더레이션 광장과 플린더스 역 앞을 지나 다시 알렉산드라 광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행진 루트였다. 끈을 잡고 서 있는 내게 앞서 대화를 나눴던 재스가 말했다. “이 끈이 파란색인 거 정말 좋지 않아요? 사람들이 남자의 색이라고 말하는 걸 여자들이 쥐고 있잖아요.” 여성을 상징하는 기호 모양의 귀고리를 직접 만들었다며 자랑스럽게 보여준 모니카는 “일요일 아침에 여기에 왜 왔나요?” 라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전 세계 자매들과의 연대를 원해요. 지금 당신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같은 날 미국의 생방송 코미디 쇼 <SNL>에 출연한 배우 제시카 차스테인은 오프닝 모놀로그에서 ‘누구보다 용감하게 거리로 나선 자매들’을 향한 메시지를 전했다. 지난 2017년은 누구보다 유명하고 능력 있고 많은 돈을 버는 여성들 역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추행, 억압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된 한 해였다. 그리고 ‘소리 내 증언하는 여성들’이 이제 그 고리를 끊겠다는 선언을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그보다 1년 전인 2016년 ‘#OO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 아래서 많은 여성들이 이어질 고통을 감내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흐름은 지금 더 큰 권력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일은 어느 한 나라의 한 여성이 아니라, 전 세계 각지의 용기 있는 많은 여성들이 함께 시작한 것이다. “가부장제는 꺼져라” “연대하는 여성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마친 뒤, 참여자들은 다시 광장 잔디밭에 모여 앉았다. 해산 연설 대신 여성으로 구성된 밴드가 작은 무대 앞에 등장했다. 무대 위에서 늘상 경청하는 성희롱에 대해 쓴 노래 가사는 이랬다. “나는 무대 위의 공주가 아니다. 위아래로 쳐다보지 마라.” 노래를 마치고 그가 말했다. “페미니즘은 남자에 반대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건 정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윤이나 작가. 책 <미쓰윤의 알바일지>, JTBC 웹드라마 <알 수도 있는 사람>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