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포식자 | 엘르코리아 (ELLE KOREA)

할리우드와 법조계에 불어닥친 성추행 사건이 패션계를 강타했다::성추행,할리우드,미투,#metoo,여성,엘르,elle.co.kr:: | 성추행,할리우드,미투,,metoo,여성,엘르,elle.co.kr

지구 전체가 연일 ‘성추행’ 사건으로 들썩들썩하다. <뉴욕 타임스>와 <뉴요커>가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을 폭로한 이래 여러 영화제작자의 성추행 사실이 드러났고,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리는 소셜 미디어 캠페인(#MeToo)이 시작됐다. 그 파장은 패션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패션계와 영화계는 비슷한 점이 많다. 신인 모델은 패션지 화보와 주요 브랜드의 광고 모델을 거쳐 영화배우로 변신하는 등 자신의 커리어를 발전시킨다. 이 과정에서 사진작가와 패션 디자이너, 클라이언트, 캐스팅 디렉터, 영화감독과 끊임없이 접촉한다. 기회를 얻고자 하는 소위 ‘을’이라 불리는 모델들은 ‘갑질’의 횡포를 경험하기도 한다. 모델 출신 카라 델레바인은 영화계 진출을 타진하던 중 와인스타인에게 성희롱을 당한 사실을 폭로했으며, 최근 보도에 의하면 와인스타인은 인기 TV 프로그램 <프로젝트 런웨이>를 모델들과의 만남을 위해 써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와인스타인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패션계에도 그동안 쉬쉬했던 성추행 소문들이 본격적으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테리 리처드슨이 있다. 올해 53세의 리처드슨은 섹슈얼리티를 탐구(?)하는 비주얼 작업으로 독보적 위치에 있는 스타 사진작가다. 변태임을 자처하며 성적으로 노골적 이미지를 투영한 그의 사진들은 9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를 최고로 군림하게 했다. 리처드슨이 함께 일하는 스태프나 모델을 성희롱한 사건은 2014년에 폭로됐는데 2001, 2007, 2011년에도 그가 비슷한 성희롱을 했음이 드러났다. 전직 모델 샬럿 워터스는 온라인 매체 <보카티브>에 리처드슨이 자신 앞에서 자위하며, 섹스를 요구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워터스의 나이는 19세였다. 테리 리처드슨의 성추행 전적은 이미 관계자 사이에서 악명 높았지만(더 이상 작업하지 않은 몇몇 잡지와 브랜드를 빼고는) ‘콘데나스트’를 비롯한 몇몇 미디어와 패션계는 리처드슨을 꾸준히 고용했다.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 이후 리처드슨이 성추문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 일하고 있는지를 다룬 기사가 불거졌다. <엘르> <코스모폴리탄> <하퍼스 바자> 등을 발행하는 허스트 그룹은 리처드슨과 일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으며, 이후 <보그>, <W>, <GQ>, <베니티 페어>, <글래머> 등의 패션지를 발행하는 ‘컨데나스트 인터내셔널’의 부사장이자 최고 운영 책임자인 제임스 울하우스도 “컨데나스트는 더 이상 사진가 테리 리처드슨과 일하고 싶지 않다. 그에게 이미 의뢰한 촬영이나 촬영을 마쳤지만 아직 발행하지 않는 화보가 있다면 이를 빼고 다른 화보로 대체하길 바란다”며 리처드슨과 완전히 연을 끊겠다고 밝혔고 패션 브랜드 발렌티노, 불가리, H&M 등도 더 이상 리처드슨을 고용할 계획이 없다고 선언했다. 패션계가 테리 리처드슨의 성희롱 의혹을 본격적으로 언급하기까지 무려 16년이 걸린 셈이다. 한편 브루스 웨버와 마리오 테스티노도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한 남성(!) 모델들의 고소가 이어지면서 불씨가 활활 타올랐다. 15명의 전·현직 모델들은 <뉴욕 타임스>를 통해 “웨버의 성추행은 사진 촬영 시간 동안과 기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이뤄졌다”고 폭로했다. 특히 브루스 웨버를 고소한 남자 모델 제이슨 보이스는 2014년 뉴욕에서 촬영할 때 제이슨에게 옷을 벗도록 지시하고 자신과 웨버의 생식기를 만지고 자신의 손가락을 웨버의 입에 넣었다고 한다. 당시 브루스 웨버는 68세였고, 제이슨 보이스는 28세였다. 더욱 경악할 만한 것은 “얼마나 성공하고 싶니? 얼마나 큰 야망을 가지고 있니?”라며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신인 모델의 성공에 대한 열정을 자극했다고 고소 내용에 밝혔다. 마리오 테스티노와 함께 일했던 어시스턴트와 남자 모델들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테스티노가 언제나 젊고 양성애자인 남성들을 채용한 뒤 점점 더 성적 요구를 강화해 왔다”고 고발한 상태다. 그동안 패션계는 이런 성추문 사건에 대해 단호한 행동을 취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사진작가 한 명을 퇴출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며, 사진가와 모델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문제도 아니다. 패션계의 성희롱 문제는 이제 수면 위로 떠올랐고 해결까지는 먼 길이 남았지만 ‘잘못됨’을 인정하고 ‘변화’를 위해 ‘침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지만 그 침묵을 깨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먼저 2012년 모델협회를 결성 후 모델 근로계약과 처우 문제 등을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전직 모델 세라 지프는 새로운 법안을 뉴욕 시에 제출했다. 지금까지 모델이 일하는 과정에서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최종 법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도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았는데, 이 법안이 통과되면 디자이너와 사진가 등이 권력을 남용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통지를 받게 된다. 한편 콘데나스트는 모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누드나 란제리, 수영복, 마약이나 음주를 연상시키거나 성적으로 자극적인 내용이 들어간 사진을 촬영할 시 반드시 모델의 동의를 구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아직 스타 사진가 3인의 성추행 사건은 법적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그동안 성추행 의혹이 제기돼도 흐지부지됐던 패션계 관행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고 있는 건 꽤 고무적이다. 한국에서도 몇 해 전 유명 포토그래퍼의 어시스턴트 성추행 사건이 논란이 된 적 있었다. 카더라 통신이 난무하며 일단락을 맺은 그 사건 역시 쉬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권력의 불균형으로 인한 성폭력 문제는 업계를 막론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태도 대신 용기 있게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공감해 주는 일을 패션계가 선두에 설 수 있는 터전이 되기를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