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연이 함께하길 | 엘르코리아 (ELLE KOREA)

고독과 불안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 온정 어린 위로가 돼주는 존재, 고양이. 세상 사람들 모두 '냥줍'하여 안식을 누리길 바라는 애묘인의 육아일기::고양이, 냥이, 길고양이, 길냥이, 냥줍, 애묘인, 집사, 엘르, elle.co.kr:: | 고양이,냥이,길고양이,길냥이,냥줍

고양이와 동거한 지 반년. 고양이 육아를 논하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고양이를 예찬하는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 가장 큰 삶의 변화를 감지하기 때문이다. 잡다한 관심사가 뒤엉켜 있던 좌뇌와 우뇌 가득 고양이가 똬리를 틀고 있다. 고양이를 향한 동경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 친구가 주워온 새끼 고양이를 집에 몰래 데려갔다가 쫓겨날 뻔했으며, 대학교 때도 두어 번 길고양이를 임시 보호했다. 그때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를 인정해야 했다. 고양이의 인형 같은 외모가 좋았던 거지, 그 존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마음은 없었던 거다. 그리하여 대학생이 되고 자취를 시작한 만큼 의지만 있으면 거둘 수 있었으나 밤새 울며 숙면을 방해하는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알레르기도 있었다. 고양이 다섯 마리를 키우는 작가 인터뷰를 갔다가 심한 알레르기 반응에 응급실에 간 적도 있다. 여러 정황이 내가 고양이 집사로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방증했지만 매번 고양이의 유혹에 빠졌다. 특히 신혼집에 길고양이들이 밥 먹으러 들락거릴 때마다 그 유혹은 치명적으로 변했다. 길고양이에게 사료 챙기는 모습을 SNS에 올릴 때마다 사람들은 입양을 부추겼다. 알레르기 증상은 항히스타민제로 해결된다고도 했다. 나는 항히스타민제에 과민 반응하는 편이기에 그 말이 불편했다. 취재하고 원고 쓰는 사람에게 몽롱하고 무기력한 상태만큼 두려운 게 없으니. 고양이와 집사들이 유혹의 손길을 뻗칠 때마다 알레르기를 핑계 삼아 요리조리 피해가던 중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 페르시안 친칠라 혹은 스코티시 스트레이트의 외모를 닮은 ‘구니니’는 동네에서 ‘프로 냥줍러’로 이름난 단골 술집 주인 부부가 새벽 퇴근길에 군인아파트에서 발견했단다. 행색이 집고양이 같은 아이가 아파트 내 놀이터의 모래를 파고 있었다고 한다. 부부는 자신들을 순순히 따르는 고양이를 거둬들여 최초 목격지의 이름으로 명명한 후, 동네 커뮤니티에 주인을 찾는 공고를 올렸다. 그때 나는 새로 들어갈 집의 수리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공사 감리와 이사 준비로 분주한 와중에도 향기로운 술을 찾아 술집을 종종 들렀고, 그때마다 구니니와 마주쳤다. 구니니는 우선 풍모가 고상했으며, 다른 길고양이와 달리 나를 쉽게 따랐다. 출중한 외모 덕에 이미 입양처가 결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몇 가지 이유로 부부는 그 집에 보내는 일을 주저했고 그사이 구니니에게 애정을 쏟는 나에게 임보를 제안했다.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중 결정적 쐐기를 박는 일이 일어났다. 이사 전날 공사가 끝난 새 집을 보러 가던 길에 부부가 구니니를 데리고 동행했다. 집에 도착해서 이동장 문을 열자 구니니는 마치 자기 집에 온 양 천연덕스럽게 집 안을 휘 둘러본 후 철퍼덕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는 지금 생각해도 의아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지난 추석 구니니를 데리고 부모님 집에 갔을 때 내가 동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틀 동안 포복 자세로 기어다니며 경계를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래서 묘연이 따로 있나 보다. 아무튼 은빛 털에 회색 털이 섞인 구니니가 대리석 상판을 걷는 광경을 보는 순간, 더 이상 운명을 거역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임보였다. 말 그대로 임시보호.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라도 돌려보낼 요량이었다. 그래서 사료도 가장 적은 양을 샀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한 행동을 사료의 산패를 고려했을 때 잘한 선택이라고 부부가 칭찬했을 때는 무척 머쓱했다. 그렇게 시작한 동거. 나는 구니니가 잘 적응하는 것보다 내 알레르기 증세가 더 염려스러웠다. 다행히 알레르기 증세는 생각보다 미약했다. 생활도 단번에 바뀌지 않았다. 영역 동물로서 사람이 아닌 집을 택해서인지 구니니와의 관계는 데면데면했다. 내 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헤집기보다 오히려 경계에 머무는 구니니를 보며 그 심정이 궁금해졌다. 냥냥냥, 냐아앙, 느어엉. 짧고 경쾌하거나 길고 날카롭게 혹은 낮고 우울하게 들리는 울음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 그때부터 고양이 육아 관련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활자로는 부족해 짬짬이 유튜브로 ‘양치하기’ ‘발톱 깎기’ ‘귀 청소하기’ 등을 주제로 한 동영상을 찾아 무한 재생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좋은 집사로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칠수록 구니니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구니니는 양치질, 발톱 손질, 귀 청소, 빗질 뭐 하나에도 익숙하지 않은 눈치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구니니가 버려진 게 아니라 잠시 집을 잃은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간절히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함께한 시간이 축적될수록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 왜냐하면 보살피는 손길을 낯설어하고, 어마어마한 식탐에 비해 구조 당시 몸무게가 터무니없이 적게 나갔기 때문이다. 물론 낯선 거리를 배회하며 살이 급격히 빠졌을 수 있으나, 수의사 말로는 위생 상태로 봤을 때 집 나온 지 하루이틀밖에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을 구니니를 보며 나는 돌려보내기는커녕 이제야 만났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속상한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술과 안주 사진 일색이던 내 SNS는 구니니 사진으로 도배됐고, 인친들도 생면부지의 고양이 집사들로 채워졌다. 한번 마시면 3차가 기본이던 내가 요즘은 2차와 3차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구니니한테 돌아갈까. 그리고 나는 여전히 가장 적은 양의 사료를 산다. 최대한 신선한 상태의 사료를 먹이기 위해서. 성분도 꼼꼼히 따진다. 고양이는 육식동물로 단백질 위주의 식사에 익숙한 탓에 탄수화물 소화 능력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단백질 함량이 40% 이상인 사료를 고르며, 단백질을 이루는 주원료가 무엇인지 확인한다. ‘Dehydrated Poultry Protein’이라고 쓰인 사료는 주재료가 가금류 중에서도 닭인지 오리인지 칠면조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식용이 아닌 부산물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주원료가 명확히 표기된 걸 선택한다. 한편 탄수화물의 함량은 따로 표기돼 있지 않기 때문에 100에서 단백질, 지방, 섬유, 수분, 회분을 이루는 퍼센트 값을 뺀 다음 계산한다. 나의 경우 가장 작은 포장을 사되 매번 다른 사료를 고른다. 고양이도 우리처럼 미각이 존재한다. 허구한 날 같은 음식을 먹으면 얼마나 질리겠는가. 그리고 사료의 주원료가 닭이나 오리, 칠면조 등의 가금류라면 간식 캔은 참치나 연어 위주로 고른다. 또 고양이가 물을 싫어하는 만큼 꾸준한 음수가 중요하므로 간식 캔의 덩어리를 잘 으깬 후 물에 타준다. 7개월 동안 잘 먹어준 덕에 현재 구니니는 털에 윤기가 흐르고 살집이 풍성한 집고양이로 변했다. “인생에 고양이를 더하면 그 합은 무한대가 된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한 말이다. 슈바이처 박사는 “유일한 피난처는 고양이와 음악”이라고 말하곤 했다. 헤밍웨이가 숨을 거두며 자신의 유산 중 일부를 고양이들에게 물려준 것도 애묘인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다. 생전에 발가락이 6개 이상인 다지증 고양이를 수십 마리 키운 헤밍웨이는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면 또 한 마리를 기르게 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들, 선대의 고양이 집사들은 고양이가 지닌 범우주적 힘을 경험했음이 분명하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느긋이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고양이를 가만히 바라보거나 만지면 인간에게까지 그들의 평온하고 고요한 심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어떤 예술 작품이 이토록 강력한 치유 능력을 가졌을까. 고양이는 고독과 불안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존재다. 물론 고양이라고 항상 성정이 고요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온 집을 헤집고 다니기도 한다. 주인을 모시는 일에 어찌 고된 순간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다음 순간 집사의 헌신적 노고를 치하하듯 고양이는 평온한 기운을 온몸으로 내뿜는다. 구니니는 치아 상태로 추측하건대 서너 살쯤 됐다고 한다. 11월 성묘 입양의 달을 지나 겨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을 안온하게 밝혀줄 고양이들이 길에서 하나둘 스러지는 계절이다. 아직 구원의 길이 열렸을 때 ‘냥줍’하여 여생을 평온하게 보내는 건 어떨까. 물론 그 존재가 다 자란 성묘라면 더 깊은 온정이 깃든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