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새로 부임한 교생 선생님의 수업에서 우리는 얼마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경쟁적이었던가! 생각해 보면 그건 ‘낯선 효과’ 때문이었다. 심리학자 대릴 벰(Daryl Bem)은 이것을 ‘이국적인 것이 낭만적’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실제로 강의실에서, 강사가 왜 성적으로 매력적인지에 대해 물어보면 여학생들은 어김없이 ‘신비함’을 손꼽는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The Beguiled>을 보는 첫 번째 키워드도 바로 신비함이다. 2017년 리메이크 작의 사전시사회가 있기 하루 전 토마스 J. 칼리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돈 시겔 감독의 1971년작 <매혹당한 사람들>을 먼저 찾아봤다. 영화는 1864년 미국 남북전쟁 중 사람들이 모두 떠난 남부 시골마을이 배경. 전투 도중 심각한 다리 부상을 입어 숲에 숨어 있던 북군 존 맥버니는 버섯을 줍던 에이미를 만나 가까스로 구조되고 그렇게 여자들만 살고 있는 기숙학교에 머물게 된다. 존이 나타나 고민에 싸인 이는 바로 이곳 책임자인 교장 마사다. 그가 적군인 데다 부상에서 회복한 후 폐쇄적인 공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때문에 남부군 부대에 포로로 넘기려 하지만 생각을 바꾸고 그를 치료해 주기로 결정한다. 이후 낯선 남자의 등장은 여자들에게 성적 동기를 유발하고 억척스런 교장 미스 마사, 순진한 교사 에드위나, 도발적인 10대 소녀 알리시아와 에이미, 흑인 노예 매티 등 어른과 아이 막론하고 그를 매혹하기 위한, 매혹당하기 경쟁을 벌인다. 내가 보기에 45년 전에 제작된 이 고딕 영화는 연출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불편하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감독이 인물을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감독은 플래시백(Flashback)을 통해 인간의 추악한 이면(정숙한 척하는 교장의 퇴폐적 상상력, 기회주의자인 존이 거짓말을 할 때마다 보여주는 사실적인 상황 등에서)을 강조하면서도 이런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의 동기에는 무관심하고 그들을 단지 도구로만 사용한다. 당시 ‘사기당한 사람들’로도 불렸다는 이 영화는 제작자이자 주연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돈 시겔 감독에겐 무척 만족스러운 작업이었다고 전해지지만 그들의 마초적인 시선은 관객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알다시피 소피아는 각본으로 인정받은 감독이다. 20대 때 그녀가 만든 <처녀 자살 소동>은 10대 소녀의 촘촘한 심리묘사로 평단을 놀라게 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오스카 각본상을 그녀 품에 안겼다. 때문에 전날 돈 시겔의 영화에서 받은 불편한 기분을 그녀의 재해석으로 보상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내용 면에선 흑인 노예 캐릭터를 없앤 것을 제외하고는(이 때문에 논란이 일었지만 소피아는 노예제가 너무 중요한 주제인 만큼 가볍게 다루지 않기 위해 오히려 캐릭터를 삭제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소개한 시대적 배경과 장소, 인물 구성, 심지어 이야기 결말까지 원작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피아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확실히 ‘숨통이 트여서’ 좋았다. 먼저 그 세계에서 연애 감정은 금기가 아닌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낯설고도 매력적인 남자를 향한 설렘은 모든 세대를 관통하는 평등한 감정이기도 하다. 또 감독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외로움을 근거로 얽히고설키는 관계에 동기를 부여한다. 마사(니콜 키드먼)가 부상병 존(콜린 파렐)에게, 엄밀히 말하면 존의 몸에 반응하는 스펀지 샤워 신(빛이 계속 움직인다는 이유로 니콜 키드먼은 이 신을 두 시간 동안 찍었다)과 존의 작은 칭찬들로 마사가 경계심을 풀게 되는 과정, 존이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에게 거듭 사랑을 고백하며 유혹하는 장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소녀 알리시아(엘르 패닝)가 존에게 좀 더 적극적인 호감을 갖게 되는 순간,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정원 일에 열중하는 존의 사실적인 노력(땀 흘리는 남자의 섹시한 아름다움과 함께) 등 인물의 정서적인 사정을 관심 있게 조명하면서 유혹하고 유혹당하는 이유에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전작보다 이야기의 군더더기를 뺐지만 오히려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느껴진 이유다. 내가 보기에 소피아에게 상식의 레이더가 장착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특수한 영화적 배경에서 거의 모든 캐릭터에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건 순수하고도 호기로운 소녀와 아름답고 진실했을 한때를 지나 강인한 여성이 된 지금의 소피아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바로 이런 감독의 시선이 칸영화제 70년 역사상 두 번째로 여성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한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지난 <엘르>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는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프로덕션 기획자인 앤 로스로부터 <매혹당한 사람들>의 또 다른 버전을 만들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 전화가 왔다. 일단 돈 시겔의 영화부터 살펴봤는데, 뭔가 계속 떠오르더라. 원작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여성 캐릭터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재해석하면 흥미로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줄거리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파워에 관한 것인데, 그건 우리의 영원한 주제이기도 하니까.” 여성의 시선으로 그리는 강한 여성상, 그것이 감독이 그리고 싶은 이 영화의 시작점이었고 그 인물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로 니콜 키드먼을 지목했다. 그다음이 절친 커스틴 던스트와 <썸웨어>에서 만난 엘르 패닝이었다. 그리고 콜린 파렐을 처음 본 순간 캐릭터가 지녀야 할 본능적이고 야성적인 면을 모두 갖춘 배우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파렐이 연기한 존 맥버니 상병은 스크린에서 잘생겨 보이다가, 섹시해 보이다가, 찌질해 보이기를 반복한다. 그것이 철저하게 여성들이 그에게 갖고 있는 호감을 기준으로 한 변화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리고 소피아의 비뚤어진 유머가 잘 표현된 애플 파이 신! 이 장면은 여성들의 유치한 심리를 단박에 정리하며 쾌감을 선사한다. 소피아의 가장 큰 장점은 섬세한 여성의 감수성을 상투적이지 않으면서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녀는 스토리가 깊지 않을 때도 남다른 비주얼 구성을 통해 적어도 ‘볼만한’ 영화를 만들어낸다. <매혹당한 사람들>은 의상 디자이너 스태이시 배탯과 네 번째 작업으로 영국의 빅토리언 무드를 이어받았다. 미국에선 ‘남북전쟁 스타일’이라고 불렸던 19세기의 빅토리언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남북전쟁시대의 ‘상복 스타일(Mourning Fashion)’임에도 실제와 큰 차이점이 있다면 바로 고운 파스텔컬러다. 비욘세의 <레모네이드> 뮤직비디오에도 등장했던 루이지애나 저택에서도 영국 이민자들이 지은 빅토리언풍의 건축양식을 느낄 수 있으며 촛대와 레이스 커튼, 패브릭 등 감독의 취향대로 고른 로코코와 빅토리아시대의 데커레이션 아이템들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된다. 물론 이런 그녀의 장점은 ‘소녀적 취향’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럴 여지는 있어 보이지만 니콜 키드먼의 우아하고도 성숙한 연기가 이 점을 잘 보완해 주고 있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권리가 평등하다고 믿는다. 영화제작 시에도 강인한 여성들을 캐스팅하고 싶다. 예술 분야 그리고 영화계에선 특히 더 강한 여성적 관점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이런 성향은 시대를 넘나들며 해석의 여지를 가진 여자들을 찾으려는 열정으로 이어진다. 이번 영화가 화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의도가 우아하게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간 평가절하됐던 <마리 앙투아네트>나 <블링 링> 같은 전작들을 소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은 9월 7일 개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