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방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인간관계의 새로운 연결 고리가 된 모바일 메신저 대화방. 이 안에서는 말의 의미와 맥락보다 리액션이 중요하게 여겨진다::대화방,sns대화방,인간관계,모바일메신저,메신저,스마트폰,소통,관계,라이프스타일,엘르,elle.co.kr:: | 대화방,sns대화방,인간관계,모바일메신저,메신저

10년 전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과 나는 뿔뿔이 흩어졌다. 각자의 상황과 미래 계획을 좇아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몇몇은 다른 나라로 떠났다. 이때부터 우리는 구글 지메일(Gmail)을 이용해 서로의 안부와 일상사를 공유했다. 메일과 인스턴트 메시지가 하루에 몇 번씩 오갔다. 그 내용은 수업 시간에 돌렸던 쪽지처럼 시시콜콜했다. 수신함을 열면 어제오늘의 연애담과 무용담, 온갖 불평과 상담거리 등이 카드명세서처럼 쏟아졌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마다의 삶이 지메일 서비스를 통해 중계됐고 8명의 멤버들은 여전히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 중에서 누군가가 이런 관계를 두고 ‘지 체인(G Chain)’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다. 지 체인은 3년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식을 업데이트하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은 시들해졌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이 뜸해졌다. 끈끈했던 지 체인도 힘을 잃었다. 지금도 나는 변함없이 친구들과 연락하며 지낸다. 다만 커뮤니케이션 환경은 우리의 삶처럼 극적으로 변했다. 못하는 것 없는 스마트폰이 소통의 중추로 자리 잡았다. 사람과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지 체인 역할은 모바일 메신저의 단체대화 기능이 배턴을 이어받았다. 누구나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모바일 메신저의 확대로 새로운 소통 매너도 생겼다. 사람들은 이 대화 채널의 장점으로 즉각성과 간편함을 꼽는다. 메일보다 쉽고 빠르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대화라는 건 상호관계의 예술이다. 말을 주면 말을 받아야 비로소 대화가 완성된다. 모바일 메신저의 즉시성에 매료된 사람들은 대화 상대도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즉시 확인하고 답을 보내길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 이메일을 보내고 답신을 받기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모바일 메신저에서는 쉽게 발휘되지 않는다. 그럴 만한 과학적인 근거도 있다. 스마트폰에 문자 메시지가 뜨면 이를 본 사람의 뇌에서 섹스, 쇼핑, 게임, 폭식할 때 쾌감을 느끼게 하는 도파민이 분비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쾌감이라는 건 느끼면 느낄수록 갈구하게 된다. 하지만 도파민의 분비는 극히 찰나에 불과하다. 결국 모바일 메신저 사용자들은 메시지를 보낸 뒤 즉각적인 응답과 더 많은 메시지를 원하게 된다는 논리다. 맙소사! 스마트폰에서 깜빡이는 문자 알림 불빛이 민트 초콜릿 쿠키만큼 중독적이고 짜릿할 줄이야. 메시지는 메시지를 낳고 다시 새로운 메시지를 낳는다. 스마트폰을 충전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사이 모바일 메신저의 단체대화방에 50여 개가 넘는 메시지가 와 있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밀린 메시지를 읽는 동안에도 똑같은 수의 메시지들이 쌓여간다. 그중에는 자신과 관련 없는 대화들도 분명 있다. 이건 ‘평등한 대화’가 아니다. “그냥 나가버려.” 내 스마트폰의 단체 대화방 세 곳에서 경쟁이라도 하듯 메시지들을 토해내는 걸 목격한 친구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업무용 대화방이 아니거나 네 삶에서 의미 있는 내용이 아니라면 일일이 챙겨보지 마. 가족 대화방이라고 해서 아빠와 딸의 관계를 읽지 않은 메시지 개수로 폄하한다면 이보다 비인간적인 일도 없을 거야. 친구간의 대화방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메시지를 바로 확인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이가 틀어질 수 있겠니?” 불행히도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남자친구와 여행하는 동안 본의 아니게 친구들과의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더니 그들이 자신만 빼고 대화방을 다시 만들었다는 누군가의 사연을 접하기도 했다. 10년 전 지 체인의 멤버였던 한 친구는 대화방에 자신의 취업과 출산 소식을 알렸다가 4000개에 달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텍스트의 대공습이랄까. 그날 그는 시도 때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메시지들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노이로제로 몰아넣고 기력을 앗아가는지 직접 체험했다. 그럼에도 단체대화방이 주는 즐거움과 가치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 많다. 엠마 와슨은 한 인터뷰에서 <해리포터> 시리즈 주연 배우들끼리 단체대화방을 통해 여전히 연락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밝히며 “사람을 얻으려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력’이란 단어는 흔히 감수해야 할 부담을 전제로 하고 쓰인다. 매번 말을 걸어 단체대화방의 침묵을 깨고 시도 때도 없이 누군가의 메시지에 즉시 응답하는 ‘부지런한’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기서도 일상의 중요한 순간들이 기록된다고 생각해. 직장 상사 때문에 화가 났을 때, 결혼식을 앞두고 마음이 초조할 때, 정치적 불만이 터져 나왔을 때 내 심정을 솔직하게 쏟아낼 수 있거든. 그때마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반론을 펼치면서 반응해. 우리 대화에 관심 없는 사람에겐 쓸데없는 잡담처럼 보이겠지. 그럼 뭐 어때. 매번 의미 있는 말만 하며 살 수는 없잖아.” 누구든 대화방을 나갈 권리가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포모 증후군(FOMO: Fear of Missing Out) 때문이라는 현대심리학적 분석도 있다. SNS 시대와 함께 거론되기 시작한 불안 증세로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거나 유행에 뒤처질까 봐 두려워 단체대화방의 ‘나가기’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는 얘기다. 몸이 좋지 않은데도 기어코 모임에 출석해서 소속감을 느껴야 마음이 안정되는 사람처럼 말이다. 심리 전문가들은 그룹의 개수가 사회성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보다 하나라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그룹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게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 단체대화방이 있다. 힘든 일이나 갈등을 겪을 때마다 그곳은 가장 쉽고 편하게 위로받을 수 있는 공간이 돼준다. 특히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눈치보지 않고 텍스트로 전할 수 있다. 때때로 단체대화방의 존재가 귀찮고 부담스럽다. 그렇지만 메시지를 보냈을 때 어김없이 응답하는 다수에게 받을 수 있는 위안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런 점에서 단체대화방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잘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안전선이자 평온과 안정, 위안을 찾으러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동굴이기도 하다. 소셜 미디어 전문가인 데이비드 애머랜드(David Amerland)는 현대인들이 단체대화방을 통해 사회적 욕구와 개인적 욕구를 좀 더 쉽게 해소하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기술 발달로 인해 사람들이 유대 관계를 맺고 교류하며 그 안에서 공동체 정신을 갖는 일이 점점 쉬워지고 있어요. 사실 소셜 미디어의 관계는 오프라인보다 의도적이고 계산적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진솔하고 신뢰 가능한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될 수 있어요.” 결국 조율의 문제다. 스마트폰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단체대화방에 열렬히 반응하고 새로운 메시지가 오길 기다리는 건 시간 낭비다. 보이지 않는 사슬에 끌려 다니느라 지치지 않으려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리액션을 취하고 싶은 그룹과 묵언을 하더라도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 주리라 믿는 그룹, 가벼운 이야기로 유쾌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룹 등 공간의 성격을 구분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다음 스텝은 이 외의 것들은 끊을 것. 모든 인간관계의 사슬에 자신을 옭아맬 수는 없다. 일단 방에서 나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