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진의 내 맘대로 스타일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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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의 쇼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선 두 여인은 말이 없다. 1988년 7월부터 함께 미국판 를 이끌어온 편집장 애나 윈투어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그레이스 코딩턴 사이에는 20년 세월도 어쩌지 못하는 어색함이 버석거린다. 2007년 9월호 미국판 가 만들어지는 8개월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는 현재 패션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편집장 애나 윈투어와 그녀를 둘러싼 편집팀, 디자이너들, 사진가 그리고 딸과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그중에서 악마로 비견될 만큼 냉혹한 애나에게 사사건건 툴툴거리며 고집을 피우는 귀여운 빨간머리 할머니가 바로 그레이스 코딩턴이다. 이 둘의 매끄럽지 못한 인연은 86년 초 애나 윈투어가 영국 의 편집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되는데, 당시에 그곳의 패션팀장을 맡고 있던 그레이스는 독재적인 스타일의 애나와 사사건건 부딪히면서 1년을 버티지 못한 채 캘빈 클라인의 홍보담당으로 옮기게 된다. 엉뚱하고 유쾌한 그레이스의 영국적 스타일은 현대적이고 이성적인 애나의 미국적 스타일과 도저히 화합할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절대’란 다짐이 지켜지는 인생사는 그리 많지 않다. 88년, 미국 로 돌아오는 애나를 향해 그레이스는 SOS를 보냈고, 이후 그레이스는 애나의 모던한 미국적 스타일에 승복한 듯 보인다. 여전히 애나의 안목을 전적으로 인정하진 못하지만 말이다. 영화 는 자신을 높은 성 안에 사는 욕심 많고 성질 더러운 두꺼비 여왕처럼 묘사한 에 대한 윈투어식 우아한 복수극일 수도 있겠다. 에서도 마음 따뜻한 천사로 그려지지는 않지만 어떻게 디자이너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신인 디자이너를 키워내며, 다음 시즌의 패션 트렌드를 설정하는지를 보여준다. 신성불가침 성역 같은 편집실 안에서 큰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단호한 ‘예스’와 ‘노’를 통해 윈투어식 가 무엇인지를 기자들에게 각인시키는 강철 같은 면모는 가 묘사한 대로 ‘기자를 쥐어짜서 훈련시키는’ 방식이다. 그런데 딸과 함께 있을 때 보여주는 녹아내릴 듯한 표정이 그녀의 진짜 모습이라면 그녀는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높고 날카로운 기준을 만들고 물러섬 없이 흔들림 없이 그 기대를 지켜나가는 것은 20년 지기에게서조차 이해받을 수 없는 힘들고 외로운 길이다. 나 역시 매달 잡지를 마감하면서 수없이 ‘예스’와 ‘노’의 순간에 직면한다. 독자 우선이 마땅하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의 상처가 마음 쓰여 주저하고 물러서게 된다. 또 화보가 잘려나갈 때 얼마나 맥이 빠지는지 경험해봐서 알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재미있고 부럽고 후회했다. ‘현실적이다’라는 말로 너무 쉽게 타협해왔던 것이 아닌가, 외면받는 게 두려워 스스로의 기준을 낮춰버린 것은 아닌가, 패션지 편집장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해왔는가 등등. 길지 않은 영화를 보면서 수만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화보의 반을 잘라낸 이후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애나 윈투어 역시 속으로 무수한 변명을 그레이스에게 건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이건 마음 약한 편집장의 감상적인 감정 이입인가? 아무튼 애나 윈투어의 초절정 카리스마 덕분에 아시아 한쪽 구석 발행부수 10만을 넘지 않는 작은 패션지 편집장조차 덩달아 준연예인 대접을 받곤 한다. 패션지 편집장이라 하면 정말 새끼 악마쯤으로 생각되는지 손톱을 들고 할퀴지 않으면 신기해하니 오히려 당혹스럽기도 하다. 진짜 좋은 건 이젠 적어도 패션지가 허영심 많은 여자들의 소비욕이나 자극하는 쓸데없는 짓으로 취급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 내내 미국의 막강한 패션 유통 자본을 등에 업고 유럽의 디자이너들을 쥐락펴락하고, 체스판의 말을 옮기듯 디자이너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최고의 스태프를 휘두르는 그녀가 정말 부러웠다. *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4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