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앤더슨이 큐레이팅한 전시 <Disobedient Bodeis>.  로에베의 크래프트 프라이즈.  필립 파레노가 제작한 셀린의 무대.  폰다지오네 프라다 뮤지엄. 도예가 존 워드의 작품.  스털링 루비의 작품이 등장한 캘빈 클라인 컬렉션 광고 캠페인.   ‘패션과 아트’의 관계는 참으로 모호하다. 언뜻 이보다 친밀할 수 없을 정도로 돈독한 사이 같지만,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거리감을 느낄 만큼 낯설게 다가오니 말이다. 하지만 같은 듯 다른 매력 때문인지 두 분야의 교류는 지금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으며 서로에게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공급하는 상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상업성이 짙은 패션계는 예술가의 자유로운 태도에서 기발한 착상을 얻고, 예술가는 대중과 긴밀한 소통이나 구체적 결과물이 필요할 때마다 패션계에 손을 내민다. 이런 관계 덕에 패션와 아트의 ‘컬래버레이션’을 내세운 행사와 프로젝트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데, 이번에 소개할 디자이너들은 아티스트의 작품과 미학적 사상에 그야말로 단단히 매료된, 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은 진정한 마니아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예술이란 반짝하고 사라지는 팝업 스토어나 SNS 이벤트라기보다는 디자이너 자신과 하우스의 긍정적인 미래를 위한 탁월한 선택이다.  “어릴 때부터 순수미술에 강한 애정을 가져왔어요. 처음 구입한 작품은 에번 핼러웨이(Evan Holloway)의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떨렸던 감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아티스트와 함께 독창적인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온 라프 시몬스는 말한다. 알다시피 그는 유명한 미술품 컬렉터이고 예술가들의 ‘절친’이자 후원자이며 그의 개인적인 공간과 쇼룸엔 저명한 예술가들의 작품이 가득하다. 좋아하는 미술가를 묻는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 없이 개인 취향을 쏟아내지만, 오랜 시간 그의 든든한 조력자가 돼온 스털링 루비를 향한 신뢰는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스털링 루비의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캘빈 클라인을 이해하는 것과 같아요. 그는 항상 놀랍도록 새로우며 앞으로 전진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입니다.” 캘빈 클라인의 수장으로 모든 준비를 마친 라프 시몬스는 이렇듯 그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라프 시몬스 2014 F/W 컬렉션과 디올 쿠튀르 컬렉션으로 쌓은 관계는 라프가 캘빈 클라인으로 이적한 후 더욱 공고해졌다. 스털링 루비의 작품이 라프 시몬스의 캘빈 컬렉션 데뷔 무대와 뉴욕 본사 쇼룸, 스토어를 가득 채운 것은 물론 새 시즌 광고 캠페인에도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라프는 한 명의 예술가와 ‘끝장을 보는’ 외곬 타입은 아니다. 조이 디비전, 뉴 오더 등 뮤지션들의 앨범 커버 작업으로 이름을 알린 그래픽 아티스트 피터 사비에와 2003년 협업 컬렉션을 선보인 이후, 캘빈 클라인 로고를 새롭게 재정비하기 위해 재회했다. 또 전설적인 사진가이자 패티 스미스의 애인이었던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작품을 통째로 차용한 라프 시몬스 2017 S/S 컬렉션은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교감을 보여준다.  한편 광적인 수집가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조너선 앤더슨의 예술 사랑 역시 독보적이다. 그가 로에베의 디렉터로 발탁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하우스에 아티스트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특히 도예를 비롯해 공예 분야에 조예가 깊은 그는 언제나 수작업을 통한 ‘장인 정신과 전통, 혁신’을 강조한다. “공예품을 수집하는 일은 삶 그 자체입니다. 신선한 자극과 영감을 선사하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패션계에서 여유로운 쉼표를 전하기도 하죠.” 그의 말처럼 로에베의 사무실과 쇼룸, 스토어에서는 도예가 존 워드와 윌리엄 매키온의 설치 작업 등 많은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게다가 매끈하게 정제된 현대미술보다 수수하고 자연스러운 ‘손맛’을 중시하는 조너선 앤더슨은 공예 작품을 수집하는 것도 모자라 결국 ‘로에베 크래프트 프라이즈’를 진행하기에 이른다. 이뿐 아니다. 최근엔 영국 햅워스 웨이크필드(Hepworth Wakefield) 갤러리의 전시 <불복종하는 몸; Disobedient Bodies> 큐레이터로 나서 패션계의 새로운 롤모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섬세한 큐레이팅이 돋보이는 이번 전시에는 헨리 무어, 장 아르프, 루이스 부르주아와 사라 루커스의 작품들과 장 폴 고티에, 이세이 미야케, 레이 가와쿠보와 헬무트 랭의 기념비적인 컬렉션이 나란히 진열돼 있다. 그런가 하면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컬렉션으로 변치 않는 사랑을 받아온 피비 파일로와 미우치아 프라다는 부드럽고 우아한 방식으로 여성들에게 ‘예술적인 삶’을 설파한다. 이들은 과시적인 방법으로 아트와 패션을 결부시키지 않는데, 조곤조곤한 어투로 예술과 삶의 상관관계를 속삭이는 듯하다. 피비 파일로는 아티스트 토머스 폴슨, 댄 그레이엄과 필립 파레노가 제작에 참여한 런웨이와 스토어, 이브 클랭과 소니아 클로네의 작품을 차용한 옷을 선보이며 예술적인 취향을 우아한 방식으로 어필한다. 아티스트와의 협업 컬렉션은 물론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차례 선보여온 미우치아 프라다 역시 마찬가지. 밀란에 자리한 폰다지오네 프라다 미술관은 예술을 향한 하우스의 애정을 대변하며, 매 시즌 예술가와 협업으로 완성한 런웨이를 통해 상업성 강한 패션계와 자유로운 예술계의 간극을 훌륭하게 조절한다. “과거에 패션계가 추구했던 ‘럭셔리’는 더 이상 효용 가치가 없습니다. 존재감이 희미해졌어요. 그것이 제가 아티스트를 향한 애정을 놓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어느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자유롭고 창의적이지요.” 이 시점에서 조너선 앤더슨의 발언은 무척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패션이 패션 그 자체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던 시절은 이미 과거의 영광으로 돌아갔다. 패션계가 추구해 온 ‘럭셔리’의 의미는 급변하는 트렌드 속에서 퇴색했고, 이제 디자이너들은 대범한 상상력과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예술가에게서 답을 찾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지적인 취향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1년 동안 많게는 12개의 컬렉션을 선보여야 하는 숨막히는 스케줄, 속도감 넘치는 소셜 미디어를 홍보 수단으로 내세우는 흐름 속에서 디자이너들이 기댈 곳은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예술가들일 테니까. 예술을 향한 열광적인 애정과 관심 그리고 예술가와의 적극적인 협업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패션 디자이너들의 명민한 ‘생존 방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