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인간 대범람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만 돌아간다. 일은 쳐다보기도 싫고 퇴근 시간은 요원하다. 잉여놀이에 빠진 직장 동료 혹은 당신에 대한 이야기. :: 칼럼,일상,반복되는,지루한,무료한,잉여한,엘르,엣진,elle.co.kr :: | :: 칼럼,일상,반복되는,지루한,무료한

“정말이지 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커피도 마시고 메신저로 수다도 떨어야지, 점심 먹고 인터넷 쇼핑도 해야지, 직장 상사 눈치도 봐야지. 일은 언제 하냐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내일 생각해봐야지.” 개인적인 거사를 치르느라 업무는 나 몰라라 하는 직장인들이 범람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취업정보업체 인크루트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인들 열에 아홉은 업무 중 딴짓한다고 했다. 모든 직장인들이 그러는 건 아니겠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정작 일은 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한다. 오죽하면 직장인 70%가 자기 주변에 ‘월급 도둑’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을까. 절대 쓸려가지 않는 젖은 낙엽처럼 ‘얇고 길게’를 모토로 책상이나 지키며 월급이나 축내는 이들을 우리는 잉여인간이라 부른다. ‘남는 인간’ 을 의미하는 잉여인간은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백수들이 소일하며 시간을 보내는 자신의 처지를 빗댄 자조 섞인 표현. 업무 의욕이 없고 무가치감에 빠져 헛짓으로 시간을 보내는 비주류형 직장인도 그들과 한통속인 셈이다. 차이라면 그들의 서식지가 사무실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역할이나 가치 찾기를 스스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자발적 잉여인간’으로 명명된다. 직장인 돌연변이의 사무실 생활은 원조 잉여족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백수 잉여인간의 공간이 컴퓨터 사방 1m인 것처럼 직장인의 잉여 놀이도 컴퓨터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출근하자마자 메신저에 로그인한 뒤 대화 상대가 들어올 때까지 뉴스 검색을 한다. 남자는 ‘스포츠’ ‘섹시 화보’ ‘벗고’ ‘아찔’이란 단어에, 여자는 ‘결별’ ‘불륜’ ‘무료’ ‘다이어트’란 뉴스 제목에 시선이 드래그된다. 누군가 메신저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손가락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하나였던 대화창이 점차 늘어나 모니터를 가득 메운다. 물론 이때도 웹 서핑은 계속 된다. 등 뒤로 왔다 갔다 하는 ‘꼰대’ 같은 상사가 마음에 걸린다면 투명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면 된다. 채팅에 빠진 직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기업들은 메신저 서비스를 차단하기도 하지만 스마트폰을 이용한 채팅까지 막을 수 없다. IT 기술의 승리다. 메신저 수다가 지겨워지면 ‘성지 순례’를 떠난다. 이슈가 되거나 구설수에 오른 사람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댓글 수십 개를 지그시 올려준다. 이른바 댓글 테러다. 백수 잉여족은 앉은 자리에서 수백 개를 쓴다고 하지만 그 정도 경지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지난 삼일절에는 모처럼 집에서 쉬며 일본 웹사이트를 1분만에 침몰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다. 물론 인터넷 쇼핑도 빠질 수 없다. 포만감이 기분을 업시킨다고 높은 가격에도 관대함을 베풀 줄 아는 지름신은 점심 이후에 주로 강림한다. 인터넷 쇼핑 매출이 가장 높은 시간이 휴일이나 저녁 이후가 아니라 오후 1시부터 2시 사이라는 통계 결과가 누구 손가락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만하다. 자신이 컴퓨터인지, 컴퓨터가 자신이지 모를 물아일체의 지경에 이르니 업무는 늘 관심 밖,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사실 그들이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부터 잉여인간의 피가 흘렀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쳤다. 하지만 세상 일이란 항상 변수가 따르게 마련.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열정과 의욕이 변기 물 내려가듯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S가 그랬다. “마케팅 부서에 입사했는데 두 달도 안 돼 구매팀으로 보내더라. 제대로 배운 게 없으니 헤맬 수밖에 없잖아. 실수만 하니까 일이 싫어지더라고.” 그는 주어진 일은 대충 처리하고 멍하니 앉아 웹서핑 삼매경에 빠져든다. 그러다 밀실 같은 사무실의 답답함을 못이기고 담배를 태우러 일어선다. 흡연은 정정당당히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데 효과적인 무기다. 공기업에서 근무하는 L은 ‘중간만 하면 된다’는 지론에 잉여 놀이를 시작하게 됐다. “솔직히 내가 아니더라도 회사는 굴러가잖아. 영업직이 아닌 이상 설렁설렁 해도 월급, 상여금이 남들과 똑같이 나오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대충 수습하며 살다보면 의욕 상실과 지루함 속에서 직장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20%의 직원이 자기능력 이상으로 열심히 일하면 나머지 80%는 기본만 해도 조직이 굴러간다는 파레토의 법칙은 직장인들이 딴짓을 하면서 죄책감을 덜어내는 데 효과적으로 쓰인다. 그렇다고 그들이 안하무인, 막무가내 식으로 잉여놀이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까닥 잘못해 상사의 눈밖에 났다가는 비자발적 잉여인간 신세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딴짓도 전략적으로 한다. 바쁘게 일하는 모양새를 내려고 책상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건 기본이요, 모니터 화면에는 항상 업무 파일을 띄워 놓는다. 출근 시간도 칼같이 지킨다. “능력파 직원도 좋아라 하지만 한결같이 성실한 직원도 사랑받는 법이야.” 보험회사에 다니며 외근을 핑계로 업무시간 대부분을 PC방에서 보내는 K의 처세술이다. 그런 식으로 마음에도 없는 일을 눈치 보며 할 바에 그만 두는 게 속 편하지 않겠냐고? K의 말을 들어보시길. “누구는 있고 싶어서 있냐? 이런 불경기에 큰맘 먹고 나와도 어디 쉽게 들어가겠어? 그만둔 사람들 보면 반 년에서 길게는 2년까지 놀더라. 그러다 정 안 되면 여자는 시집 가고, 대학원 가는데 남자는 다르잖아. 장가 가려면 돈 모아야 하지, 결혼 했으면 애들 마누라 생각에 사표는 꿈도 못 꾸지. 세상이 요지경이니 싫어도 꾸역꾸역 붙어 있을 수밖에 없잖아.” 딴짓도 내 멋대로오랜 내공과 잉여력에 따라 달라지는 그들의 잉여 라이프.Level 1 “출근해서 모닝커피 홀짝이며 뉴스 사이트를 유영하고 나면 금세 밥 먹을 시간이 된다. 식당에서 줄서기 싫어서 일찍 나서고, 맛집 간다고 일찍 나서니 남들보다 늘 이른 점심을 즐긴다. 오후의 밀려오는 졸음을 인터넷 쇼핑의 클릭질로 쫓아내다보면 어김없이 퇴근 시간. (34, 공무원)Level 2 ‘이름은?’으로 시작해 ‘드디어 1천 번째 질문. 소감은?’으로 끝나는 ‘천문천답’의 답을 채운다. 뻘겋게 충혈된 눈이 원상회복되면 질문 백개짜리 심리 테스트의 답을 채우기 시작한다.” (31, 출판업)Level 3 “투 잡을 한다. 남는 시간에 용돈이나 벌어보자며 번역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런데 시급으로 따지니 지금 받는 월급보다 훨씬 낫다. 딴짓을 해도 나처럼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 (27, 외국계 기업 비서)*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4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