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스타일 룩에 관한 어떤 남자의 이야기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옷의 한쪽을 포개듯이 다른 한쪽으로 감싸는 형태의 랩(Wrap) 드레스와 스커트는 묘한 공기를 품고 몸을 감싼다. 늘 정답처럼 꼭꼭 잠기는 지퍼나 단추와는 전혀 다른 무드를 가진 랩 스타일 룩에 관한 어떤 남자의 이야기. :: 칼럼,랩스타일,패션,로맨틱한,여성스러운,낭만적인,엘르,엣진,elle.co.kr :: | :: 칼럼,랩스타일,패션,로맨틱한,여성스러운

여자에게 옷은 자신의 몸을 감싸는 장치다. 하지만 남자에게 여자의 옷이란 수수께끼처럼 결국 풀어야만 하는 장치다. 여자는 거울 앞에 설 때를 빼면 자기 옷을 볼 수 없다. 옷을 보며 그 여자의 취향을 이해하고, 감각을 가늠하고, 여자의 의도에 말려들거나 혹은 거부하거나, 페티시를 느끼거나, 그 안에 감춰진 것에 탐심을 품는 것은 남자의 몫이다. 지금 내 눈앞에는 이번 S/S 시즌 여러 패션 브랜드들이 공통적으로 선보인 룩이 있다. 단추나 지퍼로 여자의 몸을 가두지 않고 천을 이용해 여체를 두르고, 싸고, 휘감은 ‘랩(wrap) 스타일’이다. 이렇게 랩 스타일로 여미어지는 스커트와 드레스는 봄 바람을 타고 나의 기호와 기억, 환상을 슬쩍 건드리고 지나간다.나는 랩 스타일 룩을 좀 좋아하는 것 같다. 덜 완고하고 덜 딱딱하고 덜 확실하게 외부와 관계 맺는 그 옷을 보면 낭만적인 기분에 사로잡힌다. 상대적으로 더 고집스럽고 더 확실하고 더 탄탄하게 몸을 보호하는 옷은 타인의 시선에 자의식으로 맞서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더 내세워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반대로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을 더 확실하게 감춘다. 그래서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에서 수트로 무장하고 파워포인트 영상 앞에선 여자 마케터를 보면 그녀가 든든한 남자 동료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떨리는 마음을 갑옷으로 가린, 그야말로 한 여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랩 스타일 룩 앞에서는 이런 복잡한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나에게 그것은 전적으로 낭만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에는 무엇이든 눈앞에서 움직이기만 하면 손뼉 치며 까르르 웃는 한 살 바기 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는 한 살만 더 먹으면 마흔이 되는 남자 어른이기에 내가 느끼는 낭만적인 감정을 애써 분석한다. 랩 스타일 룩에서 내가 느끼는 낭만성은 우선 그 원초성에서 오는지 모른다. 신석기시대의 여자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타잔의 연인 제인 그리고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잘못된 원근법으로 그려진 아낙들의 옷은 모두 랩 스타일이다. 중세의 산물이었을 단추와 근대 발명품인 지퍼가 사용되지 않은 옷들은 나의 DNA가 계승하고 있을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그런 기분은 가끔 호텔에서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입을 때 몸으로 직접 느껴지기도 한다.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낭만적인 기분, 똑같은 말이지만 요즘 말로 로맨틱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건 남자가 아닌 여자의 랩 스타일 룩이다. 무언가 부드럽고 흐물흐물하고 형태가 불분명하고 경계가 흐릿한 존재가 열린 공간을 많이 남긴 상태에서 여자의 몸을 단지 감싸고만 있는 상태. 그런 장면을 본다는 건 남자의 감각과 본능에 자명종을 들이대는 것과 같다. 종소리에 깨어난 감각은 갑자기 활동을 개시한다. 여체가 움직일 때마다 함께 율동을 일으키는 투명한 천들을 보며 시각이 미혹되고, 청각은 그 천이 열릴 때 들릴지도 모르는 스르륵 하는 소리, 고우면서도 자극적인 소리를 주제넘게 상상하고, 그 아래 반쯤만 숨어 있는 여체의 커브만큼 아름다운 원단의 주름을 만지고 싶어 꿈틀댄다. 그렇다면 로맨틱한 랩 스타일 룩을 좋아하거나 즐겨 입는 여자도 로맨틱한 성향을 가진 걸까? 이런, 멍청하게도 난 왜 이런 난제를 스스로 던진 걸까? 일단 내 대답은 ‘대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다. 전면에 드러난 큼지막한 YKK 지퍼로 여전사 분위기를 완성하는 가죽 점퍼를 입은 여자보다 지독히 뻔한 클리셰이지만 꽃무늬 랩 스커트에 흰색 단화를 신은 여자가 더 로맨틱한 성향을 지녔을 거라고 남자든 여자든 생각하지 않나. 혹은 덜 로맨틱한 여자라도 랩 스타일을 시도할 때만큼은 아름다운 로맨스를 꿈꾸는 게 아닐까. 우리가 사랑을 막 나누려 할 때 남자가 여자 바지의 지퍼를 내리는 것과 원피스의 허리 매듭을 천천히 당기다 마지막 순간 ‘탁’ 하고 풀리는 소리와 함께 둘 사이가 완전히 허물어지는 것은 달라도 얼마나 다른 행위인가(남자들도 지퍼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올리고 내린다). 다행인 것은 초등학교 때 “아이스케키!”를 외치며 랩 스커트를 들추고 도망가던 남자아이들이 지금의 나처럼 느끼한 생각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이스케키는 그들에게 하나의 충동적 유희였을 뿐이다. 그 충동에는 지금까지 얘기한 것들이 이미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4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