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무색하게 네덜란드 전역에 폭풍 경보가 내려진 어느 날, 사빈 마르셀리스(Sabine Marcelis)를 만나러 로테르담으로 향했다. 로테르담 항구 바로 옆에 자리한 거대한 컴플렉스 빌딩에서 튀어나온 사빈은 코듀로이 작업복 차림이었다. 디자인계의 ‘걸 크러시’랄까.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되지만, 궂은 날씨에 험한 바닷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상큼하고 경쾌한 에너지를 내뿜는 사빈은 그녀의 이미지와 작업이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태생부터 디자인적인 감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보통의 성공담과 달리 꽤 늦게 열정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던 사빈의 원래 꿈은 프로 서퍼나 스노보드 플레이어였다.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서퍼들과 스노보더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죠(웃음). 새롭게 도전할 영역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고향인 네덜란드 에인트호벤 디자인 아카데미에 편입했어요. 여기서 온갖 재료와 소재들을 경험해 보던 중 투명과 불투명의 경계에서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반짝임을 내는’ 것들에 매혹됐어요.” 레진은 디자인 과정에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고, 네온이나 거울은 솔직히 말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쓰는 재료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재료들을 가지고 그녀가 자신만의 세계를 찾기 위해 컬러와 형태에 공들여 리서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순간 그녀의 작업들이 우리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자벨 마랑, 셀린, 살 프리베, 가이아 레포시 등 다양한 패션 브랜드가 사빈 마르셀리스와의 협업을 연이어 발표한 것은 절대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다. 레진은 평이하기도 하지만 고급 소재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고도의 테크닉과 섬세한 예술적 터치를 가미해 특별한 가구와 오브제를 만든다. 전 과정에 걸쳐 그녀가 직접 생산하고, 또 그녀의 스튜디오에서만 이뤄지기 때문에 현재와 같이 공장을 겸하는 커다란 공간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엔 로테르담 운하 옆의 아주 귀여운 작업실에서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어요. 깨끗한 아틀리에에서 레진을 녹이고 실험하며 부글부글 끓이고 연기가 피어 오르고 얼룩이 여기저기 튀는 작업을 마음 놓고 하기가 점점 부담스러워졌죠. 지난여름에 아예 공장 옆으로 작업실을 옮기게 된 이유예요.” 험악한(?) 제조 공정을 즐겁게 해치우는 것만큼이나 욕심과 열정이 충만하고,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제안받을 때마다 거절하지 않고 일단 해보는 성격 탓에 건축가들과의 공간 프로젝트, 벤시몽 갤러리와의 라이팅 제품개발, 코앞에 닥친 밀란 디자인 위크 전시까지 그녀는 당분간 작업실 밖을 나갈 수 없다. <엘르 데코> 코리아 팀을 이끌고 들어간 공장(강한 레진 냄새가 코를 찌르지 않았다면!)이 마치 주문 폭주 중인 신비의 젤리 공장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 것도 그 때문이다. 케이블을 둥글게 말아 올린 모양의 네온 라이팅과 마치 누가 넓게 물감을 짜놓은 듯 자유로운 원형 거울들이 가득한데 모두 다른 프로젝트임에도 한 공간에 놓여 있음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현재는 건축과 가구 프로젝트만 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들 큼직큼직하죠. 액세서리나 스테이셔너리 등 작은 오브제는 아직 시도하지도 않았어요. 누구라도 해낼 수 있는 대량생산보다 나만 만들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생산보다 창작자이고픈 사빈 마르셀리스의 고집은 물감을 섞을 때마다 달라지는 레진의 불규칙한 매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다. 비눗방울 표면의 오묘하게 달라지는 색처럼 사빈의 디자인이 공간에 녹아들었을 때의 가역 반응이 디자인계에서 놀라운 ‘크러시’를 만들어내는 중임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