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을 처음 안 계기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님 덕분이었다. 이웃끼리 ‘파 교수님’이라 부르는 파우저 교수님은 서울대학에서 최초로 국어교육과 교수를 역임한 분으로 벽안의 미국인이지만, 웬만한 한국인보다 서울을 더 속속들이 알고 기억한다. 2011년의 일이었을 게다. <ktx매거진>에 있을 때 서촌 지킴이로 활동하던 교수님을 서촌에서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때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들은 이야기들은 초행길인 서촌에 아스라한 정감을 갖게 했다. 2013년 결혼을 앞두고 남편과 나는 3호선 라인의 집을 알아보고 다녔다. 남편 회사는 신사역, 내 회사는 안국역 인근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유력한 지역은 옥수, 약수, 금호였다. 하지만 큰 도로를 끼고 있으며, 작은 골목까지 차들이 드나들고, 고가가 있는 그곳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며칠 동안 허탕치며 쌓인 스트레스가 싸움으로 번질 때쯤, 불현듯 서촌이 생각났다. 서촌은 당시 신사동과 잠원동에 살던 우리에게 멀고 아득한 곳이었으며, 분명 경복궁역을 끼고 있었다.무작정 남편을 끌고 경복궁역에 가서 가장 가까운 부동산에 들어갔다. 지금은 여느 곳보다 익숙한 금천교시장에 있던 부동산이었다. 아저씨는 우리를 낡은 경차에 태우고 굽이진 길을 한참 동안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왕산의 정면이 한눈에 들어왔을 때, 차를 갓길에 세우고 더 작은 골목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 골목에 있던 집이 바로 지금 우리가 기대 사는 집이다. 물론, 집은 조건보다 낮은 전셋값만큼 문제점이 많았다. 아마 무던한 우리가 아니었으면 벌써 2년 전에 이 집을 나갔을 뿐 더러 아예 서촌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곳에 굳이 집을, 그것도 아파트가 아닌 낡은 연립을 사면서까지 남기로 결심한 이유는 소박하면서도 아늑한 공간이 지척에 흩어져 있으며, 어렸을 적 즐겨 봤던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을 연상시키는 이웃사촌들이 있기 때문이다.온그라운드 갤러리김종관 감독의 훈훈한 사인지난 토요일은 동네 분들의 부름으로 무척 분주했다. 대표적인 이웃사촌인 김종관 감독님의 전시가 한창이었고, 또한 친애하는 이웃사촌인 ‘보안여관’ 최성우 대표님이 기획한 전시 오프닝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곳을 들르기에 앞서 전에 인터뷰한 적이 있는 홍보라 디렉터가 운영하는 ‘갤러리 팩토리’에서 흥미로운 전시를 한대서 그곳부터 들렀다. 소꿉놀이하듯 아기자기한 도기로 가득한 식탁과 작은 크기의 일러스트 그림들은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볼수록 더 반짝반짝 빛났다. 예쁘고 기발한 것들은 눈에 가득 담고 종관 감독님의 출판 기념 전시 <골목 바이 골목>을 관람하기 위해 ‘온그라운드 갤러리’의 문을 여는 순간, 그 안에서 감독님을 발견했다. 감독님이 지닌 감성을 선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갤러리에는 신간에 사인을 받으려는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다. 물론 감독님 특유의 감성이 담긴 사진이 전시장의 공기를 훈훈히 데우고 있었고. 그 중에는 너무도 익숙한, 조금 전에 걸어 내려온 서촌의 길 사진도 여럿 있었다. 감독님과 짧은 담소를 나눈 후 터벙터벙 걸어 향한 곳은 ‘보안여관’이었다. 5시에 시작하는 전시 오프닝에 맞춰 가기 위해서였다. 올해 첫 번째 기획전인 <과거의 점점 더 깊은 층>은 뜨거웠던 촛불집회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을 기반으로 일상의 정치 풍경을 보여주는 전시로, 세월호 3주기에 맞추어 꼭 볼 만한 전시였다. 또한 최근 오픈한 신관과 구관의 전시 공간을 두루 활용하여 작품은 물론, 서로 결이 다른 공간을 관람할 수 있다. 오프닝 행사에서 축하의 의미로 대표님이 격하게 좋아하는, 직접 내린 고구마 소주를 안겨드리고 난 후 ‘일일’을 향했다.바 ‘일일’의 마티니와 벚꽃 풍경바 일일은 필운대로 한 켠에 위치한 건물 2층에 자리해 봄철 서촌의 명물인 벚꽃 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당이다. 창가 자리에 앉아 투명한 술잔 너머로 바람에 흔들리는 벚꽃을 보고 있자니, 딱 지금 같은 봄 날씨를 닮은, 화사하고 산뜻한 쇼비뇽 블랑 한잔이 절실해졌다. 그리하여 옥인길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 단골집 ‘묘한술책’의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나를 환하게 반기는 주인 내외와 어느새 자리를 차지한 동네 친구들. 그들을 보는 순간, 서촌을 결코 쉽게 떠날 수 없음을 또 한번 직감했다. 이전편 보러가기 >  다음편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