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 별다른 약속이 없어 오랜만에 휴일을 만끽하며 침대 위에 누워 뭉그적거리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큰일 났어, 나 이제 어떻게 해." 요즘 한창 연애에 열을 올리고 있던 A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휴일 아침부터. 무슨 사고라도 났어?" "아니, 뭐 사고라면 사고지. 그나저나 모닝 애프터 필, 그거 약국에서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모닝 애프터 필? 아, 사후 피임약. 한국에선 먼저 산부인과 가서 처방전을 받아야 살 수 있어." "정말? 근데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문 여는 병원도 없잖아." 외국 생활을 오래 한 A는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나에게 가장 먼저 전화했다. 물론 휴일 아침부터 사후 피임약을 찾는 건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니지만. "아니야. 휴일에도 여는 병원 있어. 일단 중앙응급의료센터 홈페이지 가서 오늘 문을 여는 산부인과 있는지 알아보고 아니면 그래, 바로 그냥 119에 전화해서 근처에 문 여는 산부인과 물어보면 알려 줄 거야." "그래, 내가 그럼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 어쨌든 땡큐." 몇 시간 뒤 A는 커피와 빵으로 두 손을 무겁게 하고 집으로 왔다. "아니, 대체 뭔 일이래? 그래 병원은 잘 갔다 왔어?" "어, 덕분에 근처에 문 여는 병원이랑 약국 찾아서 갔다 왔어. 근데 계속 불안해. 사후 피임약도 100프로 확률은 아니잖아? 만약에 임신이면 어쩌지? 나 이번에 승진했잖아. 내가 어떻게 해서 올라온 자린데 이렇게 포기할 수 없어." "그래도 24시간 전에 먹었으면 실패 확률은 5%대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아니, 5%도 불안해. 콘돔이 찢어질 확률도 그 정도일 텐데, 어제 그렇게 됐단 말이야. 이거 진짜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니까." "뭐? 그럼 어제, 콘돔이 찢어졌던 거야?" "그러니까. 이런 황당한 일이 나한테 생기다니. 알고 보니 남자가 지갑에 넣고 다닌 지 꽤 오래된 콘돔이었더라구." "그나저나 남자는 뭐래?" "뭐, 아니면 그냥 낳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던데? 난 지금 불안해 죽겠는데 자기 몸에서 벌어지는 일 아니니까 너무 무성의하게 말하더라고." "진짜 짜증 나겠다." "근데 정말 믿었던 콘돔까지 이렇게 되는 마당에 이젠 피임을 어떻게 해야 하냐? 난 위장이 약해서 그런지 경구 피임약은 속이 매스꺼워서 못먹겠더라구. 매일 같은 시간에 먹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고." "그래 맞아. 나도 그때 한번 먹어보려고 샀는데 세상에, 설명서 한 페이지 전부가 부작용에 관한 글이라서 겁이 나서 못 먹겠더라고." "맞아. 그렇다고 결혼도 안 했는데 루프나 인플라논 같은 시술을 받는 것도 좀 오바 아니야?" "진짜, 그건 돈도 아깝고 또 불편해. 근데 정말 왜 항상 피임은 여자들 몫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피임을 잘 했더라도 다음 달 생리 하기 전까지 우리는 아주 피를 말리는 데 말이야. 남자들은 이렇게까지 피임 걱정은 안 할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한국은 낙태가 불법이고, 그렇다고 아이를 키우기에 좋은 환경도 아니다. 남편 없이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에 대한 시선도 정부 지원도 좋지 않다. 그때 A가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손뼉을 쳤다.   "하, 남자들이 먹는 피임약이 있으면 딱 좋겠는데." "안그래도 그거 임상실험 중이라 조만간 나올 수도 있대." "정말? 빨리 상용화됐음 좋겠다. 그때까진 나도 그냥 안 하고 살래. 매달 생리하기 전마다 초조하고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지 뭐. 노 섹스, 노 워리스." "맞아, 맞아. 노 섹스 노 워리스." 과연 우리의 이 결심이 얼마나 갈지 지켜보자며 깔깔 웃었다.  김얀이 전하는 말?한국 나이 35세. 언제나 연애 중인 ‘연쇄 사랑마’.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고 언니 믿으면 홍콩 간다. 여러분의 성진국 언니,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한 솔직한 글로 공감을 이끌어 내는 문학하는 언니 입니다. 그대들을 위해서라면 흑역사 공개도 두렵지 않은 언프리티 섹스타 김얀의 이야기는 elle.co.kr 에서 격주 수요일 찾아 갑니다. 이전편 보러가기 >  다음편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