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추억속에 묻다 '피맛골'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처음 막걸리를 배우고, 어색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쥐어보기도 했다. 이 곳에서 많은 선배 친구들을 군대로 보내고 다시 이곳에서 휴가 나온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 얼굴을 부볐다. 못 생긴 고향 친구를 만났을 때처럼 왠지 가슴 한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뭉클해지는 곳. 그곳이 이제 사라진다. 피맛골에 대한 마지막 추억 |

"왜 피맛골이예요?" "임금님이 행차하는 마차를 피해 다니던 길이라서 피(避), 마(馬), 골이라고 부른거야. 고관대작들의 행렬이 지날 때는 모두 서서 예를 갖춰야하잖아. 그러면 얼마나 피곤하겠어. 그러니 사는 게 바쁜 서민들은 아예 뒷길로 다닌 거지. 알겠냐? 임마. 무식하긴." 꿀밤 한 대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피맛골의 내력을 알려주던 선배는 누구나 아는 내용을 자신만 아는 것처럼 의기 양양하게 얘기해주곤 했다. 그 선배가 귀여워서 때때로 알면서도 다시 한번 물어보고는 했다. 처음 막걸리를 배우고, 자신의 주량의 한계가 어디인지 임상실험도 해보고 밤새 끝나지 않을 얘기들을 끝간데 없이 늘어놓았던 그곳.조심스럽게 재털이를 달라고 했다가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바닥!'을 외쳤던 고갈비집 아주머니. 그게 바닥에 버리라는 말씀인 줄은 눈만 깜박거리며 몇 초가 지나서야 이해가 되었다. 고운 얼굴에 세월도 지나간 것마냥 수십 년 같은 고갈비를 내놓는 아주머니가 왜 고향 이웃처럼 반가운지 모르겠다. 청년 때부터 이곳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술 한 잔 기울이며 사는 얘기를 나눴던 할아버지는 같은 장소에서 또 다시 반가운 친구를 만나 조우한다. 어여 오시게. 친구를 만나면 언제가 햇살처럼 번지는 환한 미소.피맛골이 재개발 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600년 역사 골목이 사라지는 것은 참 쉬웠다. 70년대 근대화가 전국을 같은 파도로 휩쓸었듯이 2009년 디자인서울 캐치프레이즈는 동대문운동장도 오래된 피맛골도 포크레인 몇 번 움직이면 한방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죽여버리고 죽어있던 것들은 박제로 만들어 전시하는 것이 장기인 모양이다. 손바닥만한 빈대떡에 어김없이 올라오는 어리굴젓이 일품이었던 열차집, 시원한 메밀국수에 여름 더위를 날렸던 미진, 장원의 푸짐한 족발에 함흥집 고갈비, 매운 맛에 혀를 불어가면서도 수저질을 멈출 수 없었던 서린낙지. 피맛골 옆 현대식 건물에 푸드코트마냥 자리잡은 오랜 단골집들이 남의 집에 들어간 것 마냥 영 어색하다. 예전 그 맛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오랜 도시가 갖는 불편함 못지 않게 살아온 흔적에 대한 성찰이 먼저 있었어야 했다. 오래된 것들이 모두 치워버리고 쓸어버려야 할 것들은 아니다. 오래된 것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안목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과거를 잃어버릴수록 추억을 잃어버릴수록 외로워진다. 외로운 도시는 싫다.*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11월호 NO.21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