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에디터였던 시절, 마감 마지막날 즈음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면 친한 동료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주로 회사 근처의 신사동 가로수길이 목적지였다. 수면부족과 카페인 과다로 수척해진 좀비꼴을 하고 이 가게 저 가게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두 손 가득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적당한 가격의 옷이나 신발, 자잘한 액세서리 같은 것들이었다. 그쯤 되면 괜히 머쓱해 변명하기 시작한다. “이건 내가 산 게 아니야! 마감귀신이 산거야!!” ‘신상’을 제일 먼저 만져보고 촬영하는 일이다 보니 이런 쇼핑욕구는 당연한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엊그제 깨달았다. 엊그제 일어난 일이다. 오랜만에 짧은 패션 기사를 쓰게 됐다. 따로 촬영이 필요하지 않은, 텍스트 위주의 기사를 시골 새댁이 감히 쓰게 된 것이다(할렐루야!). 1년 8개월만에 에세이가 아닌 트렌드 기사를 쓰다 보니 처음에는 두근두근하다가 곧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전엔 매일 자연스레 접하던 것들이 어느덧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조사해야 했다. 고작 두 페이지짜리 기사였는데도 자료 조사에만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자료 수집을 끝내고 원고를 뿌리고(대략의 글의 흐름을 잡아 문장의 연결을 신경쓰지 않고 주루룩 나열하는 일), 반나절동안 글을 다듬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갑자기 너무나 강렬한 쇼핑욕구에 휩싸였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강도의 것. 즐겨찾기 목록을 열어 전에 눈여겨보았던 물건을 찾아 나섰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면으로 만든 키친 크로스 두 장. 귀여운 앵두 무늬와 밤비 무늬가 그려진 것이었다.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에 성공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잠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대체 이게 뭔가 싶어졌다. 그렇다. 그 시절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본능적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것은 덜 녹은 땅을 뚫고 올라오는 잡초만큼 질기고 강한 것, 우리가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시골에 내려와 살게 되면서 크게 달라진 점 중 하나는 수면 습관이다. 저녁을 만들어 먹고 치우고 앉아있다 보면 곧 잠이 쏟아지고, 조금 버티다가 결국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새벽에 꼭 한번씩 잠에서 깨 화장실에 간다는 것. 새벽 다섯시 혹은 여섯시 즈음 잠에서 깨 말똥말똥해지고, 화장실에 다녀오면 다시 잠들기 위해 애쓰다가 다시 몇 시간 더 잔다. 그렇게 느지막히 일어나면 매우 피곤해진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대체 왜 자꾸 새벽에 깨는거지?” 우리 둘의 자리를 바꿔보고 침구를, 침대 머리의 방향을 바꿔도 보았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닫게 되었다. 이것 역시 습관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을. 10시나 11시에 잠자리에 들었다면 대여섯시쯤 잠에서 깨는 게 당연하다. 그저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 것인데, 나는 일찍 일어나는 게 억울해서 억지로 다시 잠자리에 들곤 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 억울해하던 감정조차 습관이었던 것이었다!!아마도 유치원 입학하던 첫날부터 작년까지, 그러니까 삼십년 가까이 아침마다 겪어온 아침기상의 억울함이란 쉽게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골에 내려와 결심한 것 중 하나는 알람을 맞추지 않는 일.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깰 때까지 자유롭게 잠자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제 알겠다. 이것은 진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늦게까지 자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늦게까지 자야한다는 강박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보다 더 몸을 피곤하게 한다는 것도. 오늘 아침, 남편은 조깅하러 나가고 나는 조금 더 누워 있다가 한가지 다짐을 해본다. 내일은 눈이 떠지면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마셔야지. 그리고 책을 조금 읽다가 해가 뜨면 마당에 나가 보자. 아직도 죽은 것처럼 누런 잔디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잡초를 뽑으러! P.Sepi 13. <식물 살해전과자의 고백> 편을 기억하시나요? 지난 가을에 심었던 아이리스와 튤립 구근이 모진 추위를 견뎌내고 드디어 싹을 틔웠다는 소식을 알립니다(잠시 눈물 좀 훔치고...).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앞의 자갈밭을 뚫고 올라온 잡초들!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