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많다. 하지만 ‘내 남자’를 찾기는 죽기만큼 어렵다.”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는 말일 것이다. 관점을 연애에서 패션 월드로 치환해 보면 어떨까. “재능 있는 디자이너는 많다. 하지만 우리 패션 하우스에 딱 맞는 디자이너를 찾기는 죽기만큼 어렵다”가 아닐는지. 세상에는 수많은 패션 브랜드와 리테일러들이 있지만 이름 있는 패션 기업의 왕좌는 한정적이다. 그래서 생긴 말이 ‘패션계의 회전목마’다. TO는 정해져 있고, 능력을 검증받은 인재들이 서로의 자리를 바꾸면서 돌아간다는 얘기다. 무슈 디올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빈자리를 이브 생 로랑, 마크 보앙, 지안프랑코 페레, 존 갈리아노, 빌 게이튼, 라프 시몬스를 거쳐 발렌티노 출신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채우고 있듯이 말이다. 지금 여기, 말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에이스급의 자유계약 선수가 있다. 바로 12년간 지방시 하우스를 지킨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다. 그가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있는 동안 하우스의 매출은 6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수많은 패션 하우스에서 입맛을 다시는 가운데, 곧 다가올 2017 F/W 컬렉션이 끝나면 그가 어느 왕좌에 앉게 될지 공식 발표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이미 베르사체가 리카르도 티시와 협상을 마무리했다는 소문은 꽤 오랜 기간 동안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미국의 패션 일간지 (Women’s Wear Daily)에서는 발 빠르게 여러 패션계 인사들에게 리카르도 티시와 베르사체의 만남에 대해 인터뷰했다. 뉴욕의 편집 매장 제프리(Jeffrey)나 캐나다의 최대 규모 백화점 홀트 렌프루(Holt Renfrew) 등 세계적인 리테일러의 바이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저희 매장에는 베르사체가 없지만 리카르도 티시가 베르사체를 맡는다면 꼭 입점시킬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티시가 떠난 지방시의 미래는? 지난 2월 11일 오프화이트의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가 지방시로 가게 됐다는 기사가 나왔지만 곧 헛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만간 공식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니 기다려볼 일이다. 지난 6년간 컨템퍼러리 패션 하우스 끌로에를 이끌어온 클레어 웨이트 켈러도 곧 회사를 떠난다. 곧 다가오는 2017 F/W 컬렉션이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다. 피비 파일로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이 있는 런던에서 하우스 본사가 있는 파리까지 출퇴근하는 일이 버겁다는 게 이적 이유다(셀린은 피비 파일로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모시기 위해 하우스 본사를 피비 파일로의 가족이 있는 런던으로 옮기기까지 했으나 끌로에 하우스는 그만 한 관용을 베풀 생각은 없는 듯하다). 칼 라거펠트부터 마틴 싯봉, 스텔라 맥카트니, 피비 파일로, 한나 맥기본, 클레어 웨이트 켈러 등 쟁쟁한 선배들의 뒤를 이을 끌로에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현재 루이 비통에서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나타샤 램지 레비가 내정됐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일만 남았다. 회전목마는 디자이너들만의 일은 아니다. 네타포르테닷컴(Net-a-porter.com) 창립자이자 영국패션협회 회장인 파워 우먼 내털리 매스넷(Natalie Massenet)의 행보도 업계의 핫 이슈다. 2015년 네타포르테를 떠난 그녀는 애나 윈투어의 뒤를 이어 <보그> 미국 편집장이 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가장 최근 버전으로는 하이엔드 패션 온라인 리테일러인 파페치닷컴(Farfetch.com)과 밀담을 나누고 있다는 소문이다. 내털리 매스넷의 뒤를 이어 올해 초 네타포르테닷컴을 사임한 글로벌 총괄 바이어 사라 럿슨도 귀추가 주목되는 인물이다. 디자이너가 아니기에 이름은 낯설지만 얼굴과 스타일은 낯이 익은, 사토리얼리스트 같은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들의 단골 피사체다. 아제딘 알라이아나 샤넬의 파인 주얼리 등 온라인에서 판매되지 않았던 하이엔드 브랜드들을 네타포르테로 끌어왔고,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함께 네타포르테 익스클루시브 컬래버레이션 제품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신진 디자이너의 인큐베이터가 되고 싶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힌 그녀이니만큼 진보적인 리테일러들이 눈독 들일 만하다.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생 로랑의 안토니 바카렐로,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 발렌티노의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 랑방의 부크라 자라르 등 2016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패션 하우스가 새로운 수장을 맞이했다. 무슈 디올의 명맥을 잇는다는 취지로 남자 디자이너만 고집해 온 보수적인 디올 하우스가 처음으로 여자 수장을 맞이했고, 유서 깊은 파리의 하우스들은 안토니 바카렐로, 뎀나 바잘리아와 같은 1980년대에 태어난 젊은 디자이너들과 손잡았다. 그리고 클레어 웨이트 켈러, 앨버 엘버즈, 피터 던다스, 로돌포 팔리아룽가, 피터 코팽 등 떠난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나이든 국적이든 브랜드의 인지도든 간에 또 다른 편견을 깨고 손을 내밀 하우스의 러브 콜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