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나에서 재즈를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쿠바 하바나로 오감 확장 여행을 다녀온 어느 여인의 방랑 일지::쿠바,하바나,여행,여행기,시티가이드,음악,엘르,elle.co.kr:: | 쿠바,하바나,여행,여행기,시티가이드

빛바랜 스페인 양식의 건물에 걸린 이불 빨래가 정겹다.지난 밤 폭풍우로 범람한 하바나의 말레콘 방파제 앞.하바나 최고의 재즈 클럽에서 본 메이비의 공연.하바나 카사에서의 콘서트는 잊지 못할 기억이다.길거리 아티스트들이 펼치는 환상 공연.현재의 내 여행 주기를 연극식으로 계산해 보면 이제 3막 3장이 막 펼쳐진 것으로 볼 수 있으려나. 관광지 위주로 다닌 배낭여행자 시절을 졸업한 후, 본격적인 여행자 모드로 여유와 관록이 들어선 직후부턴 여행지마다 테마를 정해 떠돌기 시작했으니 여행 컨설팅 사업을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스톡홀름, 케이프타운, 바라나시, 레이캬비크, 뉴욕, 리우데자네이루, 두바이, 카이로 등 여권에 출입국 도장이 마를 새 없이 쏘다니다 보니 어느 날부터 갈증이 생겼다. 멋진 장소에 들러 부지런히 눈으로 풍광을 보고 사진으로 담아왔음에도 여행의 추억은 내 망각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채 휴대폰 속 사진을 통해서만 잠시 떠올랐다 흩어졌다. 색다른 경험에 도전해 볼 순간이 찾아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마침 내가 일하고 있는 에어비앤비에서 ‘트립’이라는 새로운 여행 스타일을 제안하는 플랫폼을 론칭했다. 현지인과 열정을 가진 일상을 공유함으로써 로컬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서비스로 여행지에서 마주친 인연과 경험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나를 위한 맞춤 상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쿄에서 유명한 블로그 ‘라면 어드벤처’를 운영하는 브라이언과 라면 시식회를 하거나, 마린 보이 키케와 마이애미의 숨은 다이빙 스폿을 찾아 바다 밑을 마음껏 누비고 다니는 식이라 나처럼 익숙한 여행 루틴에서 벗어나고픈 이들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하다(이 외에도 전 세계 12개 도시, 500여 개의 트립이 존재한다).그리하여 트립 찬스와 함께 내가 정한 ‘2017년 신년맞이 첫 여행’ 무대는 ‘올드 하바나(세월의 흔적으로 색이 바랬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옛 건축물들이 둘러싸인 비에하 광장 일대)’. 음악을 테마로 무작정 한번 떠나보기로 했다. 어쩌면 오래전에 인상 깊게 본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의 재즈 선율에 매료돼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나를 이곳으로 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OST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쿠바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아프리카 흑인 음악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식민지 시절 당시 쿠바의 경제 기반은 사탕수수 재배였는데, 스페인이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대거 들여와 노동력에 보탰다). 이후, 미국 재즈가 쿠바에 유입되면서 특유의 토착 음악과 합쳐져 자신도 모르게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몸을 흔들게 되는 아프로쿠반 재즈로 발전하게 됐다. 고로, 쿠바노의 일상엔 춤이 절대 빠지지 않는다. 실제로 올드 하바나의 숙소에 도착해 머무는 내내 동네 이웃들의 창으로 탄력적인 리듬에 우아한 멜로디가 합쳐진 쿠바의 전통 음악 손(Son)이 멈추지 않고 흘러 들어왔다. 점심상을 차리며 그릇 부딪히는 소리,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다정한 모자지간의 대화도 음악과 공기 중에 넘실거렸다. ‘거리 곳곳에 춤의 선율이 넘치는 도시.’ 이렇게 한 마디로 쿠바를 정의하고 싶다. 쿠바에 오면서 내가 신청한 트립은 ‘By Night in Havana’로 쿠바의 유명한 보컬리스트인 호스트 메이비와 쿠바 음악과 룸바 춤을 경험하는 시간. 우리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하바나 최고의 재즈 클럽 ‘라 소라 이 엘 쿠에르보(La Zorra y el Cuervo)’. 주소를 따라 찾아가 보니 시내 중심 대로변에 떡 하니 서 있는 빨간색 전화부스 앞이다. 알고 보니 이 전화 부스가 지하 클럽으로 내려가는 출입문이었다. 클럽 주인과 친구인 메이비 덕분에 길게 줄을 서지 않고 바로 무대 앞 특별석에 자리 잡았다. 재즈 클럽 특유의 어둑어둑한 실내 벽면엔 저마다 이력을 자랑하는 레전드 재즈 뮤지션들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클럽 안은 쿠바 시가의 짙은 연기와 향으로 가득하다. 모히토를 주문해 홀짝이는데, 하바나를 대표하는 젊은 트럼펫 연주자가 테이블로 찾아와 인사를 건넨다. 오늘 공연은 쿠바에 여행 온 줄리어드 음대 학생들과의 협연. 연주가 시작되고 이내 드럼, 피아노, 색소폰을 뚫고 트럼펫이 치고 나온다. 연주자만큼 젊고 에너제틱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경쾌하면서도 진한 재즈 선율을 감상했다. 이어지는 잼 세션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 연주자가 갑자기 마이크를 잡더니 “오늘 여기에 쿠바를 홀린 매혹적인 보이스의 디바가 와 있습니다”라면서 무대 위로 메이비를 불러올린다. 천천히 그녀가 무대 위로 올라가더니 묵직하고 허스키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른다. 호소력 짙은 메이비의 음성을 듣고 있노라니 <치코와 리타>의 인트로 영상이 눈앞에서 마법처럼 펼쳐지는 듯했다. 그날 밤, 우리는 재즈와 시가, 모히토 그리고 쿠바에 취했다. 메이비와의 재즈 여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녀의 친구이자, 쿠바 여인과 사랑에 빠져 하바나로 정착했다는 낭만적인 이탤리언의 카사를 찾았다. 게스트는 나를 포함해 재즈 클럽에서 만난 음악 동지들. 모두 LA, 뉴욕, 뉴질랜드 등지에서 온 여행자들이다. 어젯밤의 진한 여흥 덕분인지 어색함도 없었다. 이날의 일정은 쿠바 가정식과 와인을 즐기는 것. 편안한 분위기에서 메이비가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바쁜 워킹 맘을 둬서 메이비와 여동생은 일찍이 음악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동생은 전문 가수의 꿈을 접었지만, 메이비는 졸업 후에도 댄스 학교에 다니면서 공연단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공연단 보컬 자리가 비어 가수로 전향했고 그때부터 음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 계속됐다고. 언젠가 유럽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공연을 기획하는 프로듀서가 되는 게 꿈이라고 얘기하는 그녀의 눈빛이 무대에서만큼이나 초롱초롱했다. 한참을 그렇게 메이비의 이야기를 듣는데, 그녀의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그러더니 식탁 앞의 좁은 공간을 무대 삼아 노래를 부른다. 작은 집 거실이 꽉 차게 느껴지는 풍요로운 사운드. 메이비의 매혹적인 솔로로 출발해 연인의 사랑을 노래하는 듀오 무대 그리고 쿠바 음악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춤! 그녀의 친구들은 오늘을 위해 즉흥 안무를 짰다면서 룸바와 맘보 스텝을 밟는다. 우리 모두 홀린 듯 몸을 일으켜 무리와 어울려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들의 격려와 호령에 이끌려 왼쪽, 오른쪽으로 턴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흥겨운 하우스 콘서트를 한판 즐기고 나니 어쩐지 개운한 기분까지 든다. 그 다음 날엔 코모스 쿠바(Comos Cuba)란 작은 레스토랑에서 흰 양복을 곱게 입은 할아버지 뮤지션의 노래를 BGM 삼아 또 다른 트립을 통해 현지에서 사귄 친구들과 식사를 했다. 이 센스 만점의 뮤지션이 중간중간 “비바 쿠바!” “비바 꼬레!”를 외치며 분위기를 띄워준 덕분에 옆자리 테이블의 다른 여행자와도 어깨동무하며 노래를 즐겼다.낯선 도시에서의 어색함은 트립에서 만난 여행자들과 음악을 매개로 손쉽게 털어냈다. 그사이 내겐 단골 바도 생겼다. 하바나에 머무는 동안 매일 밤 ‘더 타번(The Tavern)’을 찾아 라이브 밴드와 ‘베사메무초’ ‘콴타나메라’ ‘체 게바라여 영원하라’ ‘찬찬’과 같은 익숙한 멜로디의 라틴 음악을 불렀다. 직접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놀라운 경험도 했다. 바 문턱을 너머 골목까지 음악이 넘쳐 흘러 새로운 여행자들이 들어와 인사하고 어울려 노래하길 몇 차례. 내게 몇 명의 친구들이 생겼는지 모른다. 굳이 어디에 들어가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하바나 거리 곳곳엔 음악에 맞춰 자연스럽게 골목과 광장을 댄스 플로어로 만드는 멋진 쿠바노들이 여행자들을 유혹한다. 지구 건너편, 쿠바 하바나에서 24시간 음악과 함께하면서 겪은 마법 같은 시간은 내가 다시 한 번 여행과 사랑에 푹 빠지게 해 줬다. photographer & writer 홍종희 에어비앤비 홍보 총괄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뼛속까지 방랑 기질이 스며 있어 탐험가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산다. 언제라도 훌쩍 떠날 수 있게 크기별로 트렁크를 준비해 현관 옆에 세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