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분노는 더 이상 네 탓을 내 탓으로 돌리거나, 온화한 미소로 집어삼키거나, 눈 질끈 감고 넘겨야 할 일이 아니다::분노,감정,스트레스,김선,칼럼니스트,엘르,elle.co.kr:: | 분노,감정,스트레스,김선,칼럼니스트

일요일 밤 9시에 카톡으로 날아든 월요일 아침 회의 소식. 월요일과 함께 스마트폰이 지구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어김없이 돌아온 아침, 대통령이 또 거짓말했다는 모닝 뉴스에 진저리를 치며 집을 나와 덜 말린 머리칼에 내려앉은 살얼음을 매달고 지하철에 몸을 우겨넣는다. 날숨들이 뿜어낸 이산화탄소에 숨 쉬기조차 고역이다. 회사는 왜 이리 멀까? 회사 근처로 이사를 꿈꾸다가도 억 소리 나는 비용에 머리를 흔들고, 비교적 만만한 ‘보증금 1000/월세 50’의 매물은 음침한 반지하라는 사실에 고개를 떨군다. 마침내 도착. 내리기도 전에 먼저 타고자 들이미는 어르신들의 어깨 펀치에 이를 악문다. 참자, 참자, 참자. 시간을 확인하러 꺼낸 스마트폰에는 (또) 카톡이 와 있다. 회의 취소. 아…. 유리창에 비친 눈 밑 주름이 더 깊어 보이는 건 착각일까 현실일까. 아침부터 세상은 이토록 나에게 친절하지 않다. 예부터 종교는 인간을 ‘용서’와 ‘관용’이라는 덕목으로 인도해 왔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밀라’는 성경 말씀을 비롯해 성당에서는 아예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오’라며 가슴을 치는 의식을 거행한다. 꽤 오랫동안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훈련돼 왔다. 화를 내는 것은 종교적으로나 품성적으로 옳지 않고 트렌드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죽하면 ‘힐링’ ‘마음 다스리기’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와 같은 이름의 자기계발서와 명상법이 유행했을까. 참아야 하는 이유는 많고도 많았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네가 참아’ ‘후배인 네가 참아’ ‘을이니까 참아’ ‘그냥 참아’. 그러나 정치도, 경제도, 사무실에서의 일상도, 통장을 스치는 월급까지도, 이래저래 살기 팍팍한 헬조선에서 그저 관용하는 것은 극기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몇 달간 집단적인 분노의 표현방식을 목격했다. 국민적인 큰 분노의 물결, 아니 분노의 불길이 전국을 뒤덮은 2016년 겨울이었다. 권력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도함과 반복된 거짓말에 분노한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주말마다 광장으로 나갔다. 월, 화, 수, 목, 금요일까지 열심히 일하고 토요일에 두터운 옷을 챙겨 입고 광장에 모이는 저항. 누군가는 그것을 한국인들만 할 수 있는 ‘주 5일제 분노’라고도 했다. 한 주 한 주가 넘어갈수록 촛불은 커졌고 사람들도 늘어났다. 거짓이 드러나고 그것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계속될수록 우리는 꾸준히, 더 뜨겁게 분노하며 매주 우리의 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노래하고, 외치고, 춤추고, 패러디하고, 행진하고, 인증사진을 찍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촛불을 나눴다. SNS에서 인기라서 최근 책으로 출간된 웹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보람은 됐고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예의 바르게,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돌려 말하면서 속으로 끙끙 앓는 것보다 대놓고 화내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대리만족을 느껴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불편함은 더 이상 참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실 ‘분노’의 감정은 아주 당연하고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이다. 그러나 항상 젠틀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해야 하고,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한다는 사회규범이 정당한 분노와 합당한 자기방어마저 억누르고 있었다. 프랑스의 사회운동가 스테판 에셀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자신의 책 <분노하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노’입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표출했던 2016년 겨울의 분노는 사회학적으로 반드시 연구되어야 하는, 연구될 수밖에 없는 대사건이다. 부정한 세상과 뻔뻔한 권력자들에 대한 분노의 표현방식이 그렇게 다양하고 즐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즐기면서 분노하는 대중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는 것도 안다. 결국 바뀌었잖아?   WHO IS SHE패션 매거진의 피처 에디터로 일하다 국회 보좌진이 되어 별안간 정계에 입문(?)했다. 몇 번의 선거를 치르고 많은 정치인을 만나며 몇 권의 책도 만들었다. 현재는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으로 매거진과 방송을 통해 최신 여론을 해설하는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