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에서 바라는 메리 크리스마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미국에서도 외치는 민주주의 그리고 포틀랜드에서 보내는 선현경 패밀리의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선현경, 이우일, 포틀랜드, 서울, 동화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엘르, elle.co.kr::


요즘 잠자리가 뒤숭숭하다.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던 단어들이 꿈속에 나오기 시작했다. 비선 실세니 퇴진, 프로포폴과 비아그라 같은 뭐 이런 이상한 것들이다. 한국 뉴스를 너무 많이 듣고 지내는 모양이다. 요즘 우리 식구들의 아침은 일어나자마자 각자의 타임 라인에 올라온 뉴스들을 서로 전달하기 바쁘다. 하루가 온통 뉴스로 가득 차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별사건 사고 없이 평온히 지내던 우리에게 정말이지 너무도 많은 대화거리를 던져주었다. 서로 새로 알게 된 걸 이야기하다 보면 하루가 모자랄 판이다. 민주주의와 나라에 대해 생각하고 걱정하고 토론하게 된 요즘이다(이렇게 쓰고 보니 좋은 점도 있구나!) 그런데 한국뿐만이 아니다. 여기 미국의 포틀랜드도 만만치 않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온 지역인 포틀랜드는 연일 ‘트럼프는 내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소리 지르며 시위 중이다. 이번 선거로 오리건 주 포틀랜드는 안티 트럼프 시위를 가장 먼저 한 도시로 유명해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 날 밤부터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를 했다. 며칠 사이 점점 더 과격해진 시위 단체는 공공기물에 스프레이를 뿌려가면서 파손하기 시작했다. 시위 사흘째 되던 날엔 다리 위에서 총격전까지 벌어져 부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그 일로 체포된 사람이 25명이나 된다는 뉴스를 들었다. 하지만 20일쯤 지나니 매일같이 다운타운에서 들리던 시위의 목소리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그 대신 동네 곳곳에서 지역 주민들끼리 작은 모임을 열면서 미국의 시국에 대해 논의를 하는, 장기전에 돌입한 모습이다. 물론 ‘트럼프로 인한 지구 멸망설 논의’나 ‘삼차 세계대전 방지’라고 붙은 포스터들이 길에 붙어있다. 길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는다. 다만 열불이 난 사람들이 아직 좀 남아 있다. 어젯밤에도 새벽 두 시에 집 앞 공터에서 고래고래 화를 내는 사람이 있어 경찰차가 도착하기 직전까지 아파트 전체가 다 시끄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피켓을 들고 다 함께 행진하던 행렬은 사라졌다.


하긴 추수 감사절을 지나 블랙 프라이 데이에 이어 사이버 먼데이(Cyber Monday; 사이버먼데이는 전미유통연맹(NRF)이 2005년 대대적인 판촉을 기획하기 위해 고안해낸 용어로,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인 추수감사절이 지난 후 일상으로 돌아온 소비자들이 온라인 쇼핑을 즐기면서 온라인 쇼핑몰의 매출이 급등한 데서 유래)를 지나면 수그러들 수밖에 없을 것도 같다. 다들 추수 감사절엔 칠면조 요리를 해야 하고 다음 날엔 그동안 사고 싶어서 세일을 기다린 물건들을 사러 갈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월요일엔 미처 사지 못한 물건들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라며, 세일에 세일을 거듭한다. 시국이야 어떻든 일단 쇼핑을 하라며 유혹한다. 블랙 프라이 데이엔 가게들도 평소보다 더 일찍 열고 늦게 닫는다. 요즘처럼 해가 없는 계절엔 오후 5시면 벌써 캄캄해져서 거리에서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는데, 그날은 평소보다 서너 배는 많았다. 블랙 프라이 데이니 말로만 듣던 엄청난 인파의 쇼핑 줄서기나 물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기대하며 다운타운으로 나가보았다. 하지만 여긴 포틀랜드, 홍대 근처에서 살다 온 우리에겐 평일 낮의 홍대 앞보다도 한산하다.



사실 우리가 밖으로 나간 이유는 크리스마스의 본격 시즌이 시작됨을 알리는 트리 점등식을 보기 위해서였다. 시내 광장에 세운 거대한 트리에 45만 개의 전구가 일제히 켜지는 광경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광장에 서 있는 전나무 트리가 36년이나 땅에 뿌리를 내린 채 살아온 나무를 잘라온 거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데, 어쩐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란 큰 나무를 크리스마스 한 시즌을 위해 단칼에 베다니. 하지만 크리스마스트리는 애초에 트리를 목적으로 심어진 나무들이고 성장 과정에서 충분한 산소를 발생시키니 걱정하지 말라고 친환경 트리 주의자들은 말한다. 또 다 사용한 후 나무는 썩기 때문에 퇴비가 된다며 PVC 성분이 들어 있는 인공 트리보다 훨씬 자연 친화적이라고 주장한다. 나처럼 인공 트리만 고집해 쓰던 사람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역시 언제 봐도 대형트리는 아름답다. 거대한 생명의 자태를 뽐내며 광장 앞에 우뚝 솟은 크리스마스트리는 볼 때마다 위엄이 느껴진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자 다운타운의 파이오니아 광장 앞에는 점등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고 무대 앞에서는 포틀랜드의 자랑 ‘핑크 마티니’가 공연을 시작했다. 핑크 마티니다운 달콤하고 로맨틱한 크리스마스 캐롤이 건물 사이로 울려 퍼진다. 이렇게 여기에서 크리스마스 노래를 듣고 있자니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추위에 떨며 시위를 하는 내 친구들과 가족들이 생각났다. 한국인들은 결판이 날 듯 안 나서 벌써 5주째 길 위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다. 먹먹해진다. 요즘처럼 서울로 가고 싶었던 적이 없다. 그 차가운 길 위에서 행진을, 아침 이슬을 같이 부르지 못해 너무나 안타깝고 죄스럽다. 괜히 고래고래 엉망진창인 발음으로 캐럴을 따라 불러 주위의 눈총을 샀다. 제발 크리스마스 즈음엔 오늘과 다른 새날이 밝기를. 따뜻한 저녁이 있는 주말을 맞이하기를. 진심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기대해본다.
역사의 현장에서 촛불을 들고 계신 모든 분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PROFILE 동화 작가 선현경(@sunny_7008)은 만능 재주꾼으로 지난해 포틀랜드로 긴 여행을 떠났다. 포틀랜드에서도 변함없이 만화가 남편 이우일(@i00111)과 딸 은서(@e_eunseooo), 고양이 카프카를 관찰하면서 별탈 없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외치는 민주주의 그리고 포틀랜드에서 보내는 선현경 패밀리의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선현경, 이우일, 포틀랜드, 서울, 동화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엘르, el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