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도시에 만연한 상냥한 폭력에 대해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새로 낸 소설가 정이현에게 더 날을 세운 것과 더 누그러뜨린 것을 물었다::상냥한 폭력의 시대,달콤한 나의 도시,정이현,소설가,인터뷰,엘르,elle.co.kr:: | 상냥한 폭력의 시대,달콤한 나의 도시,정이현,소설가,인터뷰

정이현은 전에 없이 발칙하고 감각적인 여성들을 그려낸 첫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쿨’하다 못해 이기적이기까지 한 싱글 라이프를 그려낸 2006년 작 <달콤한 나의 도시>는 30대 여성들의 일과 우정, 사랑이 도시적인 코드와 어우러져 ‘도발적이고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로 불리며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리고 10년 뒤, 또 다른 소설집과 두 권의 산문집, 장편소설 세 편을 지나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가 있다. 삶의 흐름과 세상의 변화 안에서 조금은 변했지만 어쩌면 그대로인, 2016년 정이현의 소설과 현실세계를 들여다봤다.트위터에서 이번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 표지를 격하게 좋아했다 미니멀한 디자인의 일러스트레이션은 물론 띠지의 핑크 컬러까지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 묶어낸 소설들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소설을 여러 번 읽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안 그래도 동료들끼리 업계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 ‘문지(문학과지성사)’ 표지 ‘약 먹고 디자인한다’며 감탄하던 참이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전에 없이 서늘한 느낌이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와 <달콤한 나의 도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자유롭던 정이현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더니 제도에 편승해 기성세대가 된 거냐'는 질문도 받았다. 내 소설이 엄청난 파국을 다루지는 않지만, 한 꺼풀만 벗겨도 세상 곳곳에 깔려 있는 불안함에 대해 지금껏 이야기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보다 한국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당시만 해도 세상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세상은 계속 진보하고, 갈등과 문제가 있어도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때는 자유, ‘좋은 것’을 향해 갈 것이라는 최소한의 동의가 있었다. 당시 그런 분위기를 실감하는 단어가 ‘골드 미스’였고. 그 무렵 쓰인 소설들은 실제로 골드 미스들의 싱글 라이프를 묘사했다 30대 중반 여자들이 결혼을 안 하는 것은 눈이 높아서 혹은 가진 것이 많아서 남자를 선택하지 않는 종류 등이었다. 이기적이라고 비난받을지언정 선택에 의한 삶이었다는 말이다. 그게 2010년 즈음이었고, 요즘은 모두 ‘어차피 흙수저’라고 자조하며 산다. 이 책의 단편들은 2013년 하반기부터 대부분의 작품이 세월호 사태 이후에 쓰였다. 우리도, 소설의 인물들도 밝거나 희망에 차 있을 수 없다. 그저 각자 살아나갈 뿐이다. ‘상냥한 폭력’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폭력을 당한 건지 아닌지 헷갈리기 때문에 ‘상냥한’ 폭력이다. 책이 나오고 상냥한 폭력의 에피소드를 여럿 들었다. 사소하게는 이런 것들. 막 치아 교정을 시작했는데 보자마자 “나이 먹으면 이 다 틀어진다는데 어떡해?”라고 묻는다든지, “쌍꺼풀 수술 너무 자연스럽다. 티 하나도 안 나”라고 큰소리로 말한다든지. 솔직하지 않은 건 확실한 것 같은데 현대 사회의 생활이 그런 것 같다. 속을 밀접하게 내보이지 않고, 금방 가까워졌다가도 돌아서면 안 보고. 오랜만에 연락해서 서로를 찾는 것도 어차피 최소한의 이해관계에 얽힌 것 아닐까? 전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실처럼 자잘한 관계만 많아진 셈이다. ‘내 마음은 상처를 받았어’라고 말할 기회나 의지도 별로 없고. 이래저래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소설가들은 어떻게든 소설을 쓴다 다들 쓸 것이다. 업이라서. 달리 다른 것을 할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어서. 책에 ‘관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있다. 사실 나는 관성적으로 살기 시작하면 작가로서의 삶은 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또 소설가로 10년 이상 지내 보니 ‘루틴’하지 않으면 일상생활도 소설가의 삶도 돌아가지 않더라. 최근 <어린 왕자>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왕자가 순례하는 여러 별 중 예전에는 기억도 안 나던 ‘가로등지기의 별’이 가장 와 닿았다. 하루 몇 번씩 가로등 불을 켰다 껐다 계속하는 사람이 있는데, 왕자는 모든 별에서 친구가 될 만한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루틴한 삶의 사소함에 깃든 위대성이랄까? 이전에 생각지 못한 삶의 형태를 인정하게 됐다. 정이현이 변했다면, 그런 점에서 변한 것 아닐까 그럴 수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챙기고, 가족들이 모두 나가면 집 안을 정리한 다음, 글을 쓰거나 잡무를 처리한다. 때가 되면 아이를 픽업하고. 소설은 꾸준히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사람이 쓰는 것이라는 말도 실감하고. 또래의 동료 소설가들도 대기업 과장처럼 성실하게 살고 있다. 사회에서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일상을 영위하려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다. 예전에 했던 말들, 나는 이렇게 살 것이고 저렇게 살지 않을 거라고 공언했던 말들을 되돌아보니 부끄러웠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관조적인 태도는 거의 그대로다 현대소설이란 ‘감정’에 방점이 찍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나 르포 작가 같은 시선을 유지하고 싶다. 어떤 소재와 국면, 시점을 선택했느냐에 내 판단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으니까. ‘여고생이 아이를 가졌다(아무것도 아닌 것)’는 이야기에서도 여고생이 아닌 엄마의 시선을 선택했는데 거기에 이미 내가 들어가 있다. 화법이나 디테일에 있어서도 인물과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독자들이 감정이입을 하려고 할 때 ‘정말 그럴까?’라고 냉정하게 물어볼 수 있도록. 어쩌면 그런 건조함 때문에 정이현 소설이 꾸준히 읽히는 것 같다. 웃음이나 눈물을 유발하는, 드라마틱한 영화나 소설을 보기가 부담스럽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웬만하면 믿고 읽어주는 소수의 충실한 독자들이 있으면 됐다고 생각한다. 내가 훌륭한 작가라서가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작가라고 믿고 읽는 거다. 나도 나와 비슷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독자들을 믿고 쓰는 거고. 소설은 이토록 차가운데, 실제로 만난 정이현은 오히려 러블리한 느낌이다 보기보단 차갑다. 어색할 때 잘 웃어서 그런가? 예상보다 친화력 있다는 말을 듣는 것도 사실이다. 평범한 친구들도 많고, 아이의 유치원 엄마들과도 잘 놀러 다니고 친하게 지낸다. 독자들이 잘 모르는 정이현의 민낯은 어떤가 게으르다. 어쩔 수 없이 움직이지만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없다. 거절하지 못해서, 해야 되니까, 끌려가면서 사는 것이 내 민낯이다. 물론 너무 하기 싫은 건 안 한다. 하지만 뭔가 너무 하고 싶고, 재미있어 하고, 성공하고 싶고, 그런 건 없다. 대체로 ‘그렇게 해서 뭐해?’라는 식. 한 번 시작한 것은 끝을 볼 정도로 집중력은 있는데, 열정이나 의지 때문이 아니라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시대에 여전히 소설이 유효하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소설을 쓴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무기력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내 소설에 무슨 힘이 있겠나. 하지만 소설에는 생각할 수 있는 빈틈이 있다. 정말 허구인, 모든 우연이 딱 맞아떨어지는 드라마보다 늘 뭔가가 잘 맞지 않는 소설이 훨씬 현실에 가깝다. 현대소설의 고난은 영웅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17세인 우리 아이가 배가 불렀는데, 어떻게 하지?’처럼 사실적이다. 모든 소설은 과거형으로 쓰이기 때문에, 소설과 현실 사이에는 아주 조금의 낙차가 있다.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고 발화하는 순간, 발생하는 1초의 차이. 현재형이 과거형이 되는 찰나에서 아주 작은 쉼표나 물음표가 나온다. 느낌표가 아니라.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