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가 열네 살이던 1990년대, 미스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구입한 소위 ‘배꼽티’에는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Attitude(반항적인 태도)’란 단어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반항적인 구석이라곤 단 1%도 찾아볼 수 없던, 온순하고 내성적인 내게 엄마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티셔츠를 사주셨다). 비로소 그해 겨울, 나름 모험 정신을 발휘해 반란(?)을 일으켜 보기로 마음먹었고 곧바로 프렌치 커넥션의 ‘FCUK fashion’이라 쓰인 티셔츠를 입고 문을 나섰다. 고작 한 글자 차이지만 나름 욕설로 인식되는 슬로건의 티셔츠를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입으니 잠재된 반항심이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당시 디자이너가 그 슬로건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정부에 대한 반기를 든 10대들의 반항 어린 무드를 잘 담아낸 듯 보였다. 그리고 지난 2016 S/S 시즌 그 캠페인을 다시 재현한 프렌치 커넥션의 CEO 스티븐 마크스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90년대 ‘FCUK’ 슬로건을 오마주하는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말했다. 패션은 늘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지만 정치적 격변과 사회 불안이 고조된 요즘 같은 현실에선 시대의 분위기만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패션계를 이끄는 영 파워 디자이너들은 물론 지지 하디드, 제이든 스미스 등 뉴 밀레니얼 스타까지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기 위해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지금껏 슬로건은 시대상에 따라 변모해 왔다. 슬로건 티셔츠의 창시자 캐서린 햄넷과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 70~80년대 격동의 런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은 발언권을 사수하기 위한 게릴라 시위에 슬로건 티셔츠를 강력한 도구로 삼았다. “발언의 자유를 잃었다고 느끼는 이들이 슬로건 티셔츠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니 어떻게 지나칠 수 있나.” 캐서린 햄넷은 요즘 패션계에 불어 닥친 슬로건의 부활을 두고 젊은 세대가 스스로 좌절감을 느낀다는 걸 방증한다고 해석했다. 분노가 가득하고 정치적인 날을 세우던 펑크의 시대를 지나 유머러스한 슬로건 플레이가 시작된 건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다. 이 무렵 헨리 홀랜드는 라임을 살린 팝아트적 슬로건 티셔츠를 선보여 런던의 ‘핫’한 디자이너로 급부상했다. 그는 2017 S/S 컬렉션 피날레에 이 티셔츠의 영광을 재현했는데 달라진 점이라면 당시 아기네스 딘의 자리를 켄덜 제너와 칼리 클로스, 벨라 하디드 등 요즘 잘나가는 톱 모델들(그리고 어마어마한 SNS 팔로어를 지닌!)이 대신해 디지털 바이럴 효과를 톡톡히 봤다는 점이다. 슬로건 티셔츠를 하이패션으로 이끈 결정적 역할을 한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는 ‘May The Bridges I Burn Light The Way(내가 불태우는 다리가 빛이 되리)’란 문구로 내재된 분노를 표출했다. “2015년 끔찍했던 파리 테러가 일어난 다음 날 아침이 여전히 생생하다. 길을 걷는데 마치 좀비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느꼈던 분노가 지난 쇼에 반영될 수는 있지만 아마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것 같다. 슬로건 티셔츠를 통해 감정을 필터링하듯 말이다.” 스타들도 예외는 아니다. 리한나는 얼마 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힐러리를 지지하는 해시태그 슬로건인 ‘#Imwithher(힐러리와 함께)’ 티셔츠를 입고 파파라치 컷에 찍혔고, 레이디 가가는 도널드 트럼프 당선에 반대하는 1인 시위에 그치지 않고 ‘Love Trumps Hate(사랑이 증오를 이긴다)’는 새빨간 문구(혈서처럼 쓰인)의 티셔츠를 입고 세상에 맞섰다. 21세기의 새 챕터를 연 슬로건 티셔츠는 그 어떤 말보다 강하다. 한 장짜리 티셔츠에 지나지 않지만 그 안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게가 담겨 있다. 물론 소리로 전해지지 않아도 때론 단도직입적이다가도 때론 차분하고 점잖은 감정까지 실을 수 있다. 무엇보다 유명 스타나 디자이너, 지금 이 글을 쓰는 에디터 등 누구나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다면 언제든 옷으로 표현할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대중의 공감이 필요하고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들끓는 요즘, 그 불안을 해소하고 치유할 수 있는 당신의 한 마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