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 유니언잭, 그리고 미켈레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구찌 크루즈 컬렉션 현장 속으로::구찌,컬렉션,구찌 크루즈,크루즈 컬렉션,웨스트민스터 사원,런던,초대장,플라워패턴,알레산드로 미켈레,로맨틱,로맨티시즘,패션,엘르,elle.co.kr:: | 구찌,컬렉션,구찌 크루즈,크루즈 컬렉션,웨스트민스터 사원

무뚝뚝한 입국심사로 유명한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리면서 이토록 벅차 올랐던 적이 있었나? 시점은 지난 6월, 장소는 런던의 상징적 건축물인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그곳에서 구찌가 크루즈 쇼를 연다. 여기까지는 그닥 특별하지 않다. 샤넬은 쿠바에서, 루이 비통은 무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쇼를 열었다. 그에 비하면 런던은 ‘와우’가 나오기에는 너무 익숙한 도시. 그러나 쇼를 여는 이가 알레산드로 미켈레라면 얘기가 다르다. 뉴욕 첼시 거리에서 쇼를 열었던 그가 이번엔 뭘 보여줄까? 물론 이번 쇼에서 톰 포드식의 헤로인 시크나 프리다 지아니니식의 글램 룩이 부활할 리는 없다. 그는 모두의 예상대로 미켈레식의 다다익선이 주는 미학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 다시 한 번 입증할 것이다. 호텔로 범상치 않은 초대장이 배달됐다. 겉에 알록달록하고 구불구불한 뱀 프린트가 있고 중간에 두 개의 볼록 렌즈가 끼워진 VR 헤드셋. 용도는 예상을 비켜갔다. 렌즈 앞에 스마트폰 대신, 필름이 끼워진 패널 조각을 고정하면 눈앞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풍경이 선명하게 보인다. 밀레니얼 세대에게 익숙한 VR용이 아닌, 아날로그적 사용을 의도한 점이 재미있다. 한때 런던에서 몇 년간 시간을 보낸 적 있는 미켈레는 런던의 풍부한 역사적 유산과 애티튜드에 강렬하게 매료됐다. 그는 수많은 장소 중에서도 패션 이벤트 장소로 각광받는 ‘힙’한 이스트 엔드 지역이 아닌 관광객들로 붐비는 랜드마크를 떠올렸다. 한 번도 쇼가 열린 적 없고 누구도 꿈꿔보지 못한 런던의 상징, 이번 쇼는 700년의 사원 역사상 ‘첫’ 패션쇼로 기록된다. 이번 허가에 대해 일각에선 교회의 상업적 용도를 우려하기도 했지만, 미켈레의 꿈은 이뤄졌다(할렐루야!). 런던의 전형적인 잿빛 하늘이 드리워진 D데이, 쇼장은 사원의 동쪽에 있는 회랑에 마련됐다. 본래 용도는 수도사들의 산책과 명상을 위한 공간이지만 오늘만큼은 총 90m 길이의 ‘ㅁ’자 형 복도가 런웨이로 사용된다. 회랑에 들어서기 전, 홍보 담당자가 미리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사원 안에선 나지막이 얘기하세요’ ‘촬영은 자제해 주세요’. 영국의 위대한 유산에서 열리는 첫 패션쇼, 역사적인 모멘트에 그 정도 매너를 지키는 건 어렵지 않다. 엘르 패닝, 알렉사 청, 공효진, 에이셉 라키, 소코, 셀마 헤이엑 등 빅 셀러브리티들을 포함한 모든 손님들은 구찌가 준비한 사려 깊은 선물, 고양이와 호랑이와 뱀이 수놓인 초록색 태피스트리 벨벳 쿠션 위에 사뿐이 앉아 쇼를 기다리고 있다. 성가대와 파이프오르간 연주로 녹음된 사이먼 앤 가펑클의 ‘스카보로 페어’의 선율이 사원의 높은 천장에 곡명을 울리며 쇼가 시작됐다. 오프닝은 호랑이 자수가 놓인 레인보 스웨터에 타탄 스커트를 입은 빨강머리 모델 소피아 프리젠. 이어 여왕의 나라, 펑크의 나라, 신사의 나라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모아놓은 보물상자를 열어젖힌 듯, 회랑 위로 우르르 쏟아져나온 96차례의 카오스, 아니 96벌의 컬렉션! 빅토리언식의 레이스와 러플, 40년대 폴카 도트, 90년대 스트리트 룩, 전형적인 티포트 프린트, 영국식 정원, 70년대의 펑크, 유니언 잭과 타탄 체크, 엘리자베스 여왕, 고양이와 호랑이, 스테포드셔 테리어, 스터드, 스팽글, 리본, 우아한 것과 삐딱한 것, 반짝이는 것과 낡아빠진 것, 추하고 못생긴 것…. 영국의 과거부터 현재를 관통하는 거의 모든 영감들을 이 방에 그러모은 것 같다. 그러나 모든 디자이너 앞에 공평하게 똑같은 재료들을 펼쳐놓는다 해도 미켈레처럼 극적인 느낌을 주진 못할 거라고 장담한다. 가장 영국적인 재료를 요리하는 그의 방식은 지극히 이탤리언적이며 호화롭고 소녀처럼 감성적인 한편, 괴짜스럽고 유쾌하며 스트리트적 유희와 예상외의 조합으로 가득하다. 불과 1~2m 간격으로 거의 줄을 서다시피 이어진 100여 명의 행렬은 시각적인 파워를 극대화했다. 하나하나의 룩을 완성한 다채로운 요소들을 제대로 보려면 1박 2일도 모자랄 것 같다. 특히 액세서리들은 미켈레의 일곱 번의 컬렉션 중에서 가장 매혹적이다. 레인보 플랫폼 클리퍼로 재탄생한 에이스 스니커즈, 3선 양말을 매치한 스터드 키튼 힐, 퍼 블로퍼의 뒤를 이을 로고 슬리퍼, 장미가 수놓인 실비 백, 렌즈가 위로 젖혀지는 플립 선글라스, 세상 더없이 화려한 스테이트먼트 이어링 그리고 윌아이엠과 협업으로 탄생한 스마트 워치가 불타오르는 쇼핑 욕구를 부채질한다. ‘구찌 고스트’로 알려진 트레버 앤드루의 그래피티 협업에 이어, 미켈레는 구찌의 로고를 패러디한 2000대 후반의 페이크 티셔츠(일명 부치(Bucci) 티셔츠)를 오리지널 버전으로 부활시킨 역발상으로 또 한 번 빅 히트를 예고했다. 아름다운 카오스에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를 때쯤 쇼는 끝이 났다. 미켈레는 쇼가 열릴 때마다 철학자처럼 심오한 문구들이 적힌 컨셉트 자료를 공유했는데 이번만은 아니다. 대신 다른 걸 준비했다. 쇼 다음 날, 관람시간이 끝난 후 프라이빗하게 진행된 웨스트민스터 사원 투어. 여러 번 이곳을 지나쳤지만 내부를 둘러보는 건 처음이다. 1066년 이후의 모든 대관식과 16번의 로열 웨딩, 다이애나 빈의 장례식을 비롯한 왕실의 대사가 치러진 곳. 역대 왕들이 묻힌 묘지와 왕가의 유물들, 윈스턴 처칠부터 셰익스피어, 뉴턴, 바이런, 워즈워스, 헨델 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묘비로 빼곡하게 채워진 바닥과 벽면…. 그리고, 150년 동안 지어진 고딕양식의 형언할 수 없는 건축적 미학. 보름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공식 인스타그램에 회랑 사진이 포스팅됐다. 그 사진엔 #guccicruise17과 @gucci를 해시태그해 사원의 또 다른 역사적 모멘트가 요즘에 걸맞은 언어로 기록돼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래서 미켈레는 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갔나? 그는 쇼 직후 백스테이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런던이 쿨해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데, 난 역사야말로 가장 쿨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날 우리는 미켈레가 만든 96벌의 착장과 함께 영국에서 가장 역사적인 장소의 아름다움을 찬찬히 음미했다. 그리고 비로소 그의 말을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