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롬쇠에서 유명한 해변 텔레그라북타 (Telegrafburkta). 평화롭고 운치 있는 삶, 트롬쇠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청량한 수돗물을 한 잔 받아 마시고 호밀 빵 위에 브라운 치즈를 얹어 먹는다. 비몽사몽이던 눈에 초점이 생기면 창문 너머 공원을 가로질러 출근하는 평균 신장 190cm의 아름답고 창백한 남자들이 보인다. 여기는 북극권에 위치한 노르웨이의 소도시, 트롬쇠다.   중고 가게의 아름다운 물건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피는 노르웨이 소녀. 8월 초 서울을 떠날 때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어머나, 북극에도 사람이 사니?”와 “어떻게 한국을 떠날 용기를 냈니?”였다. 그렇게 양어깨에 지인들의 염려와 부러움을, 두 손엔 60kg이 넘는 이민 가방 2개를 들고 트롬쇠에 도착했다. 지도를 한 번 보시라. 처음에 트롬쇠의 위치를 찾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보다 경도가 높다니! 2년 전 여름, 아이슬란드를 여행할 때 오리털 패딩을 피부처럼 여기며 오들오들 떨었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트롬쇠에 온 지 벌써 2개월째, 어느새 북유럽 가을 날씨에 적응해 니트와 바버 재킷만으로도 버틸 만하다. 엄마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자유의 아이콘이 됐다. ‘그 집 딸은 외국 나가서 사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는 하소연을 들었을 엄마 친구의 딸들에겐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또한 그것이 우연의 연속으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변명한다. 어쩌다 보니 침몰한 여객선에 갇힌 희생자 한 명 구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그저 사람답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려고 애썼는데 실패했고, 어쩌다 보니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프리랜서가 됐으며 어쩌다가 또 비슷한 처지의 애인을 만나 “우리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지 않을래?” 하고 힘을 모은 그런 상황인 거다. 애인과 나는 함께 떠나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고 실행에 옮겼다. 결국 우리는 학생과 배우자 신분으로 노르웨이 임시 거주권을 거머쥐었다.   항구 앞 번화가 풍경. 트롬쇠에서의 생활은 몹시 만족할 만하다. 이곳에 오기 전 ‘뉴욕이나 베를린처럼 힙한 도시가 아니어서 실망스럽다’고 투덜거렸던 날들을 반성한다. 트롬쇠엔 세계 최전방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의 전시나 요즘 잘나가는 밴드의 순회 공연은 없지만 노르웨이인들의 진짜 삶이 있다. 트롬쇠 사람들은 대개 아침 7시에 출근해 집에서 싸 간 점심 도시락을 먹고 오후 4시에 퇴근한 뒤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잠시 낮잠을 자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는다. 그 후엔 달리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강아지와 산책을 한다. 일에 쫓기지 않아서인지 복지국 사람들은 언제나 여유만만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나는 가까이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그들의 평화롭고 운치 있는 삶을 관찰한다. 게다가 이곳은 북극권의 주요 항구인 동시에 유명한 관광지이자 명망 있는 종합대학에 교환 학생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이유로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도 거의 없다. 내가 노르웨이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채면 바로 영어로 다시 응대해 준다. 그래서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소도시에선 꿈도 못 꿀 일들이 트롬쇠에선 가끔 일어난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내릴 역을 지나쳐 종점까지 온 동양인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든가, 자주 가는 슈퍼마켓 직원과 농담을 주고받는 그런 일들 말이다. 인종차별도 없다. 오히려 의심하고 경계하는 건 우리 쪽이다. “저 사람. 우리한테 왜 이렇게 잘해줄까?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아니, 집주인은 아직 노르웨이 통장 개설도 못한 우리를 어떻게 믿고 덥석 집을 맡기는 거야?” 그럴 때마다 남편과 나는 낄낄거리며 “혹시 너 의심국에서 왔니?” 하고 농을 던진다. 서서히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건네고 서로를 배려하고 남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 젖어들고 있다. 가장 좋은 점은 가까운 사람과는 더 가깝게, 먼 사람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내는 문화다. 대부분의 북유럽 사람들이 그렇듯 노르웨이에서도 나와 남의 사적인 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멀기 때문에 남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일례로 저녁엔 불을 다 켜놓고 창문도 활짝 열어둔다. 어떤 TV 프로그램을 보는지, 집 안에 시계가 몇 개인지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게 그냥 둔다. 아무도 남의 집에 관심 없단 뜻이다. 인구도 적다. 서울시 마포구만 한 크기의 땅에 7만 명이 살고 있다(참고로 마포구 구민은 38만 명이다). 서로 간섭하지 않고 부대끼지 않는 삶, 그걸 찾아 운명처럼 트롬쇠에 도달했나 보다. 길거리에서 내 몸을 훑어보던 불편한 시선, 틀에서 벗어나면 사방에서 쏟아지던 잔소리, 직장 동료끼리 시시콜콜한 사적인 고민을 털어놓지 않으면 소외되던 문화 같은 게 여긴 없다. 한국에선 늘 잔정 없고 냉정하단 소릴 듣던 내게 맞는 옷을 찾은 기분이다. 옛 직장 선배의 말처럼 영국의 브리스톨 뒷골목이나 노르웨이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나야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결국 다른 대륙에서 살면서 발견하고 싶은 건 나에게 꼭 맞는 삶의 태도와 그걸 수용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다.   날씨 좋은 주말, 집 앞 공원 풍경. 물론 혼자 왔다면? 외로워서 앓아누웠을지도 모른다. 노르웨이는 카페 문화도 활발하지 않고 지인을 집으로 부르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현지인 친구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다.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집에 나 혼자 덩그러니 있었다면 생을 통틀어 가장 큰 고독과 대면했으리라. 비싼 물가도 고민거리 중 하나. 서울보다 생활비가 1.5배 정도 들어가고 외식은 꿈도 못 꾼다. 하지만 저축한 돈을 까먹으면서도 웃음이 실실 나는 게 두 달 차 외국인 거주자의 민낯이다. 언젠가 봤던 이름 모를 노르웨이 영화 중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다. “복지냐, 햇볕이냐. 어차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해.” 아직 북극의 겨울을 겪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여전히 전자에 마음이 쏠린다. 두 달간 해가 뜨지 않는 무시무시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지금 당장은 걱정하지 않으련다. 긴밀하게 연락하는 친구들에게 집단 이주를 권하고 싶다.   접니다. 김윤정<나일론>, <더 트래블러>의 피처 에디터로 일하다 여행을 이유로 아이슬란드로 떠났다. 차마 그곳에서도 직업병을 못 버리고 아이슬란드의 문화 신을 소개하는 책 <아이슬란드 컬처 클럽>을 펴냈다. 최근엔 트롬쇠로 이주해 글 쓰고 노래하는 아티스트 그룹 ‘아크틱 콜렉티브’를 결성했다. 가장 많이 쓰는 노르웨이어 헤이 헤이(Hej Hej). ‘안녕하세요’란 뜻의 인사말. 하루에 수십 번씩 듣는다. 살아보니 한국에 들여오면 좋을 것 짜 먹는 캐비어. 치약처럼 생긴 튜브 안에 염장한 캐비어가 들어 있다. 버터를 바른 호밀 빵 위에 삶은 달걀, 오이를 차례로 올린 뒤 캐비어를 쭉 짜서 먹으면 꿀맛. 단골 가게 또는 아지트 프레텍스(Fretex). 북극 원주민인 사미족의 전통 의상부터 손으로 뜬 울 장갑, 그림, 그릇까지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중고 가게.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악명 높은 노르웨이의 물가를 비껴가는 곳. 집 구하기에 얽힌 일화 집주인은 트롬쇠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방사선과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집을 샀는데 3년 만에 해가 뜨지 않는 트롬쇠의 겨울에 질려 남쪽 도시로 근무지를 옮긴다고 했다. 인터뷰를 보러 간 날, 앞서 다녀간 갓 스무 살 된 커플보다 나이 든 우리가 더 안심된다며 고맙게도 외국인에게 집을 내줬다. 내가 여기에서 하는 활동 뜨개질과 크로스컨트리 스키. 올겨울 목표는 순록 무늬가 들어간 장갑과 양말을 뜨고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신고 산을 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