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식물 살해 전과자의 고백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마당을 갖게 된다면 무엇을 하겠어요? 많은 이들이 답할 것이다. 가드닝! 나 역시 그렇다. 그 시작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김자혜, 하동, 지리산, 마당,시골집, 가드닝,건축,할머니, 한옥, 레노베이션, 건축가, 집, 엘르, elle.co.kr:: | 김자혜,하동,지리산,마당,시골집

일본 드라마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에 등장하는 아르바이트생 시마짱. 그녀는 꽃을 좋아한다. 좋아할 뿐 아니라 잘 가꾸는 능력도 가졌다. “집에 화분이 가득해요. 예전부터 이웃집 사람들이 시들 것 같으면 언제나 저희 집에 가져왔어요. 지금도 위층에 사는 분이 부탁해서 가끔씩 화분을 받아오고 있어요.” 그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녀는 답한다. “그저 평범하게 물을 주고 있을 뿐인걸요.”영화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의 한 장면 흥, 거짓말이다. 평범하게 물을 줘도 식물은 죽어버린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시마짱과는 정반대의 인간형. 내가 키우는 식물은 꽃을 피우기는 커녕 잎도 다 떨구고, 썩은 줄기와 커다란 화분만 덩그러니 남긴다. 희망을 품고 꽃시장에서 새 화분을 사다가 집 어딘가에 놓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낑낑거리며 아파트 관리실 옆에 빈 화분을 내놓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식물 살해 전과는 쌓여만 가고, 그러다가 식물 키우기를 아주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역시 식물을 키우는 데에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 내게는 식물에게 해로운 나쁜 에너지가 있는 것인가? 라며 좌절하게 된 것이다.그럴 때마다 할머니를 떠올렸다. 병을 얻어 21년 동안 당신의 작은 방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 나의 할머니. 할머니는 내 나이 여섯 살에 쓰러졌다. 어느 여름 친구들과 외출한 뒤 집에 돌아와 피곤하다며 낮잠을 청했는데, 할머니는 그날 이후 다시는 두 다리로 일어서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건강한 모습은 정원을 가꾸는 장면이다. 나 어릴 적 우리 집은 작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이 꽃과 나무로 가득했다. 꽃과 나무들은 할머니의 온 세계였다. 그것들을 가꾸는 것이 할머니의 즐거운 생활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싱싱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할머니에게 보답하곤 했다.과꽃과 한련화, 깨꽃, 분꽃, 철쭉 등 화려한 꽃도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목련이다. 집 안에는 커다란 목련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목련이 만개하는 그 짧은 계절을 할머니는 가장 사랑했다. 목련꽃이 지고 땅으로 떨어지면 마당을 지저분하게 만들어 늘 말썽이었지만, 할머니가 목련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찰나의 만개를 사랑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없이 늘 차분하고 교양있던 여인. 세상 떠나는 날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던 강한 여인.60대 중반, 아직 너무 젊은 나이에 그만 나쁜 병에 붙들려 아파트의 작은 방 안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온 세계가 되어버린 할머니. 그녀의 남은 생을 위해 엄마는 베란다에 화초를 키우기 시작했다. 나무와 꽃으로 베란다를 가득 채우는 것으로 모자라 나중에는 꽃집도 차렸다.(왼쪽)할머니의 꽃밭에서 언니와 나. (오른쪽)눈이 오면 할머니의 단풍나무와 목련나무 사이에 눈사람을 만들곤 했다. 젊은 엄마와 나, 그리고 언니들.내가 식물 살해범이라는 오욕(!)을 떨치고 다시 가드닝을 시작해보기로 결심한 것은 단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27년동안 함께 살았던 나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일. 할머니처럼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려는 몸부림이다. 나의 첫 가드닝은 지금부터 내년 봄까지, 그 첫 학기를 시작한다. 며칠 뒤에는 오일장에 나가봐야겠다. 추식 구근(가을에 심는 뿌리 꽃)을 심어 내년 봄에 정말로 땅을 뚫고 나오는지 한번 지켜볼 참이다.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