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계절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미친 더위가 끝나고 어느 날 아침 코끝이 찡하더니, 감나무에 매달린 감이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시골에서의 첫 가을이 온 것이다.::김자혜, 하동, 지리산, 시골집, 건축, 한옥, 레노베이션, 건축가, 집, 엘르, elle.co.kr:: | 김자혜,하동,지리산,시골집,건축

아침에 눈을 떠보니 바깥이 수상하다. 평소 같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건 나뿐 아니었다. 남편이 소리친다. “수상한 사람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어!” 창밖을 내다보니, 여럿의 ‘맨 인 블랙’이 우리집 앞을 지나고 있었다. 정체는 몰라도 이 동네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좀 무서운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시골 동네는 옆집 사정에 훤하다. 우리가 수십년 된 감나무 세 그루를 무자비하게 베어버린 것을, 둘이서 마당에 엎드려 잔디를 심은 것을,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끔 친구들이 놀러오면 밤늦게까지 시끌벅적 논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집을 처음 구경하러 온 날, 두 집 건너 양옥집 할머니가 옥상에 숨어 우리를 훔쳐보고 있는 걸 발견하고 소름끼쳤던 기억도 있다. 이쯤 되면 ‘어느 집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동네사람들이 전부 안다’는 옛 말은 과장이 아니다. 저들은 대체 왜 우리를 궁금해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인적이 드물고 방문자가 없는 조용한 동네인 탓도 있고, 흥미로운 것 없이 지루한 일상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젊은 두 이방인이 수십년동안 지켜 온 작은 마을의 평화를 깨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저들에게 선뜻 다가서지 않고 조용히 집에만 머물고 있다는 점도 이상할 테고(이 부분에 관해서는 다음에 길게 얘기하도록 하겠다).다시 ‘맨인블랙’으로 돌아와서, 아무튼 그날 아침엔 뭔가 좀 이상했고, 남편과 나는 늘 관찰당하던 입장이 아닌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 추리에 나섰다. 창문 곁에 서서 가만히 살펴보니, ‘맨인블랙’ 무리는 장례를 마친 가족들처럼 보였다. 검은 양복과 지친 행색이, 서로 닮은 얼굴이, 무엇보다 무리 중 한명이 팔에 두른 상주 표식이 그랬다. 아랫집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거였다. 볼일이 있어 이틀 동안 서울에 다녀온 참이었으니, 우리만 그 소식을 까맣게 몰랐다. 옷장 깊은 곳에서 남편의 검은 양복을 꺼냈다. 약간의 조의금을 안주머니에 넣고서 남편 홀로 그 집을 찾았다. 다녀온 남편이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할아버지가 동네에 떠도는 우리에 관한 소문을 다 얘기해줬어. 지붕공사는 왜 그 사장한테 맡겼냐고 따져 묻기도 하고. 아, 그리고 머리가 희끗한 사위는 대문까지 나와서 따로 부탁하더라. 혹시 할아버지가 찾아 와 술 좀 사다달라고 부탁해도 절대로 사다주지 말라고.” 수십 년 동안 한 이불을 썼던 아내는 죽어 누웠는데, 그 죽음과 상관없이, 그저 젊은이가 찾아온 것이 반가워 수다를 늘어놓는 늙은 남편. 그는 며칠 뒤, 사위의 예상대로 우리집 마당에 찾아와 술 좀 사다달라며 생떼를 쓰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동네 어디에도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는 없었다. 할머니를 네댓번 마주쳤던 남편만이 며칠 동안 멍했다. 할머니가 지붕 위에 올라가 감나무의 높은 가지를 치기에 남편이 제가 해드릴게요, 했더니 아직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다며 웃던 할머니. 그 짧은 인연조차 그를 멍하게 만드는데, 수십년지기 이웃들은 어찌하여 저토록 태연한가. 어쩌면 그들에게 이웃이 죽어 사라지는 것은, 감이 익어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 시골에서는 모든 것이 소리없이 오간다. 계절이, 비와 바람이, 꽃이, 열매가. 모든 생명이 소리도 없이 오고 또 간다. 그 모든 생명들 가운데 인간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자연이 하는 일은 과연 옳다고 여기는 것. 그 겸손과 체념을 배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