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알베르토의 ‘알’ 라이크 록 뮤직

‘알’ 라이크 록 뮤직, 알베르토가 전하는 뮤직 칼럼 9월의 주인공은 의심할 바 없는 ‘기타 히어로’이자 록앤롤의 전설 지미 헨드릭스.

BYELLE2016.09.21



 


일렉트릭 기타를 치는 사람이라면 ‘지미 헨드릭스’라는 이름을 모를 수 없을 터. 최소한 그들은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을 따라 기타 반주를 흉내 내 봤거나 무대 위에서 기타를 불 태우는 지미 헨드릭스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를 한번쯤 걸어 봤을 것이다. 60년대의 록 기타 신에서 대변혁을 일으킨 그는 모든 일렉트릭 기타리스트의 위대한 스승이자 흑인 록 뮤지션의 영웅이다.

지미 헨드릭스는 1942년 11월 27일 시애틀에서 제임스 마셜 헨드릭스(James Marshall Hendrix)라는 이름을 갖고 태어났다. 지미의 아버지는 군인 신분이라, 상황상 그가 태어난 지 3년 뒤에야 처음 얼굴을 봤고 그 후 부모님의 이혼으로 지미와 남동생은 입양된 동생 3명과 함께 아버지와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일을 돕다 줄이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낡은 우쿠렐레를 하나 발견했다. 그리고 그 우쿨렐레가 지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첫 번째 악기가 됐다. 이후, 지미는 5달러로 첫 기타를 구매했고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비비킹(B.B. King)과 같은 전설적인 흑인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음악을 혼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한편 19살이 채 되기도 전에 지미는 두 번이나 절도 죄로 강제로 입대하게 됐다. 군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그는 기타에 집중했고 이 시기에 같은 밴드 맴버가 될 흑인 베이시스트 연주자인 빌리 콕스(Billy Cox)를 만나 밤마다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그는 군대에서의 생활에 실패했고 일 년 후 곧바로 제대해 테네시 주를 기반으로 기타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뉴욕에 건너가 자신의 음악을 알리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 당시 유명한 록앤롤 뮤지션들은 다 백인이어서 흑인이었던 지미가 메인 기타리스트로 활동할 수 있는 밴드를 찾기 어려웠고 급여도 얼마 안 돼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늘은 재능과 노력이 있는 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어느 날 뉴욕 치타 클럽에서 연주하다가 롤링스톤스 기타리스트인 키스 리차드(Keith Richards)의 여자 친구인 린다 키스(Linda Keith)와 친해지게 되었고 그의 기타 연주의 매력에 빠진 린다가 남자친구의 인맥을 통해 레코드 사 매니저들에게 지미를 소개했다. 그 중 전설적인 영국 밴드인 애니멀스(The Animals)의 베이스 기타리스트인 차스 챈들러(Chas Chandler)가 지미의 음악을 듣고 바로 매니저와 프로듀서를 맡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차스 챈들러와 계약한 후 지미는 런던에서 드러머 미치 미첼(Mitch Mitchell)과 베이스 기타리스트 노엘 레딩(Noel Redding)을 소개 받아 마침내 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The Jimi Hendrix Experience)라는 밴드를 구성하게 된다(사실 노엘 레딩은 베이스가 아니라 기타리스트였지만 지미와 같은 밴드에서 꼭 활동하고 싶어서 베이스라도 치겠다고 말한 것). 세션맨 지미 헨드릭스가 아닌 지미 헨드릭스 자기 자신의 밴드로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1966년 9월, 지미는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밴드인 ‘더 크림(The Cream)’ 콘서트를 보러 갔을 때 처음으로 클랩튼을 만나서 한두 곡만 연주해도 되냐고 물어 봤다. 클랩튼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의했고 더 크림의 콘서트 중 헨드릭스는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 한 곡을 연주했다(에릭 클랩튼은 ‘그 연주를 보고 내 인생이 다시는 전과 같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고 후에 말했다). 그 후 지미는 11월 중순 백 오네일즈(Bag O’Nails)라는 아주 유명한 런던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게 되었다. 그 날 관객 중 대부분이 영국 록앤롤의 전설적인 인물들이었다. 에릭 클랩튼,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제프 벡, 더 후의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 롤링스톤스의 브라이언 존스와 믹 재거, 그리고 소프트 머신의 케빈 에어즈(Kevin Ayers)가 다 같은 자리에 모인 이 전설적인 자리에서 지미가 무대에 올라 연주 시작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지미 헨드릭스 이전에는 기타로 그런 소리를 내는 이가 없었고 그런 연주가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해 본 사람도 없었다. 모두 지미가 록앤롤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때부터 지미가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미국에서는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오르지도 못했다. 하지만 1967년에 지미가 폴 매카트니와 브라이언 존스의 강력 추천으로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에서 연주하게 되면서 비로소 전설이 되었다. 이로 기타 줄을 튕기고 등 뒤로 기타를 치는 등 엄청난 연주 기술을 발휘하며 무대를 장악한 지미는 연주가 끝난 후 무대에서 기타를 불에 태우고 깨트려 버렸다.

바로 그 날부터다. 그는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희생해야 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기타를 희생한다.”라고 말하며 콘서트가 끝난 무대에서 음악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의미로 자신의 기타를 깨부수기 시작한 것이. 1967년과 1968년에 지미가 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란 밴드와 , , 라는 세 장의 앨범을 발매하고 유럽과 미국을 투어 하면서 1969년에 전세계적으로 최고의 록 뮤지션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처음으로 기타 앰프를 악기처럼 사용했고 피드백 증폭기, “와와” 소리를 내는 페달, 스테레오 사운드와 페이징 효과(stereophonic phasing effects) 등을 사용하기 시작한 록앤롤의 개척자였다.

하지만 1969년 어마어마한 인기와 성공 속에서 술과 마약의 중독에 빠진 지미에게 신체적, 정신적 위기가 시작된다. 그 해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참석한 그는 페스티벌 마지막 날 무대에 올라 갑자기 미국 국가를 록앤롤 식으로 연주했는데, 어떤 이들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 들이기도 했고 “우리 모두, 백인과 흑인 인종 상관 없이 똑같이 미국인이고 형제다”라는 반 인종 차별적인 메시지로 받아 들이기도 했다. 1970년 마침내 밴드가 해체되고 나서 지미가 같은 부대에 있었던 빌리 콕스와 드러머 버디 마일즈와 밴드 오브 집시(Band of Gypsys)라는 흑인 록밴드를 구성해서 밴드명과 동명의 마지막 앨범을 발매했다. 그리고 9월 18일 런던 사마르칸드 호텔에서 여자친구와 마지막 저녁을 보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사인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인한 질식사였다. 매니저인 차스 챈들러는 “그는 언젠가 마약으로 죽었을 거다”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가족의 운명, 록앤롤의 역사, 흑인 뮤지션의 지위를 통째로 바꾸어 버렸다.

RECOMMENDATIONS
Must Listen
Purple Haze (Are You Experienced, 1967)
Little Wing (Axis : Bold As Love, 1968)
Red House (Are You Experienced, 1967)

Legendary Songs
Voodoo Chile (Electric Ladyland, 1968)
Hey Joe (Are You Experienced, 1967)

Albe’s Favorite
All Along The Watchtower (Electric Ladyland, 1968)
Voodoo Child (Slight Return) (Electric Ladyland, 1968)


PROFILE 본명인 ‘알베르토 몬디’보다 알베르토, 알차장, 알오빠와 같은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마성의 이탈리안 가이. 중국에서 만난 와이프를 쫓아 한국에 왔다 정착하게 된 사랑꾼. 평화와 사랑을 믿고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지지하는 대인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