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이고의 농도 짙은 석양을 흡수한 도심 풍경과 라호야코브.한국에서 출발한 시각이 분명히 7월 27일 오후 6시였는데, 샌디에이고에 도착하니 여전히 27일 오후 6시였다. 16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곳에서 또다시 같은 하루를 시작하는 묘한 기분. 호텔로 향한 택시에서 바라본 도심 풍경은 서울과 달리 태평하게 흘러갔다. 365일 내내 하와이만큼이나 쾌청한 날씨, 유난히 친절한 사람들, 샌디에이고를 감싼 느릿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이곳을 ‘힙’한 패션 도시가 아닌, 노후를 보내기에 제격인 도시로 각인시켰다. 도대체 왜 샌디에이고에? 이 여정이 시작된 건 한 통의 메일 때문이었다. 수상자들이 단상에 오른 시상식 전경.패션 필름 네트워크(Fashion Film Network)에서 <엘르> 패션 필름 <#엘르쇼타임(ElleShow time)>이 라호야 인터내셔널 패션 필름 페스티벌(La Jolla International Fashion Film Festival)의 공식 경쟁 부문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며칠 후, 노미네이션 배지를 받고 난 후에야 단순한 상영회가 아닌 레드 카펫 행사를 동반한 시상식이라는 걸 알았다. LJFFF는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패션 필름 어워드로 ‘패션 필름의 칸’으로 불린다. <#엘르쇼타임>이 무려 6개 부문(베스트 크리에이티브 컨셉트, 베스트 액세서리, 베스트 패션, 베스트 헤어스타일링, 베스트 메이크업, 베스트 뮤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으니, 여정을 떠날 이유는 충분했다. 단상에 올라 작품을 설명 중인 다니엘 전 감독.처음 밟아본 라호야의 레드 카펫. 캐주얼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와 인터뷰가 오갔다.시상식 전날, 라호야 비치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컨템퍼러리 아트 센터에서 상영회가 열렸다. 그곳으로 곧장 가지 않고 바다표범들이 누워 선탠을 즐기는 라호야 코브 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500석 규모의 극장에 도착하자, 작품을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할리우드의 영향력 있는 관계자들이 눈에 띄었다. 상영 전, 감독들은 무대에 올라 직접 작품을 설명해야 한다. 진행자가 <#엘르쇼타임>을 호명하자, 큰 무대는 처음이라 갑자기 긴장감이 들었다. K패션의 산실인 서울 컬렉션의 백스테이지를 재현한 13개의 현장감 넘치는 모멘트, 적절한 비트와 위트 있는 음색을 더하기 위해 고심한 선곡, 지금의 서울을 대표하는 라이징 모델들과 카메오로 출연한 디자이너들의 조화…. 말보다 영상이 더 많은 걸 설명해 주리라는 걸 믿기에 최대한 명료하게 설명을 마쳤다. 이어 스틸과 슬로모션이 결합된 <#엘르쇼타임>이 대형 스크린에 상영되고 선명한 ‘ELLE’ 로고가 화면을 가득 채울 때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다음 날엔 블랙 타이 차림으로 레드 카펫 행사와 시상식에 참석했다. 의상상을 수상한 마누엘 알바란 감독의 <myth>.작품상을 수상한 에스터 도르아웃 미스 감독의 <nubivagant>.지난 5월호에 실린 <#엘르쇼타임> 화보의 파노라마식 패션 필름.결과부터 얘기하면,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엘르쇼타임>은 아쉽지만 위너가 되진 못했다. CG 작업이 더해진 환상적인 색감의 영상미가 돋보였던 가 작품상을, 로봇 코스튬이 빛났던 가 의상상을 수상했는데 19편의 수상작 모두 예술성이 높은 메가 작품들이라 지금도 머릿속을 맴돌 만큼 영감과 자극이 됐다. “1만1000개의 후보작 중에서 경쟁작으로 뽑힌 것 자체가 무척 의미 있다.” “패션이라는 범주에서 봤을 때 <#엘르쇼타임>이 가장 흥미롭고 적합한 필름이었다.” 심사위원들과 패널, 홍보대사, 경쟁작 감독들이 건넨 극찬, 한국인의 참석이 처음이라는 글로벌 어워드에서 할리우드 프로듀서 사이에 회자된 K패션과 <엘르> 필름, 서울 패션위크에 대한 대화는 벅찬 경험으로 남았다. 또다시 이 도시를 찾게 된다면 그땐 꼭 단상에 올라 수상 소감을 얘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