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 맥주 없인 못 살아! 연일 우리 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뜨겁다는 뉴스를 듣고 있는 요즘, 여기 포틀랜드도 지난 달과는 다르게 꽤 뜨거운 날씨였다. 오후엔 39도까지 올라가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리 덥지가 않다. 습기가 없고 나무가 많아서인지 아침과 저녁으로는 서늘한 바람까지 분다. 새벽에는 추워서 솜이불을 덮을 정도다. 친구가 전화로 “이런 한증막 같은 더위는 처음”이라며, 하소연 하다 여기 여름 날씨를 듣고 말했다. “너네,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는 이 더위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고.” 흠, 뭔가 설득력이 전혀 없는 발언이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래서 나라를 구한 마음으로 여름을 나기로 했다. ‘뭔가 좋은 일을 한 것도 같으니 맥주라도 마셔볼까?’이곳 포틀랜드는 맥주를 빼고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는 도시다. 사실, 이 글을 연재할 초반부터 맥주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조금만 더 ‘알고’(‘마시고’가 절대 아니다.) 쓰자는 마음에 꾹 참고 기다려 왔다. 그래서 더 많이 알아냈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도 안 된다. 그 종류가 너무 많아 다 찾아볼 수도 없다. 맥주 하면 떠오는 도시 뮌헨과 베를린, 프라하를 다 제치고 수제 맥주 양조장이 세계에서 제일 많은 도시가 포틀랜드라고 한다. 양조장 세계 1위라니, 나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처음 도시 여기저기를 걸어 다닐 때 눈에 띄게 브루어리(양조장)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맥주를 파는 집을 ‘호프집’이라고 이름 붙이듯 이곳 맥주 집은 다 ‘양조장’이라고 쓰나 보다 했다. 마트에서 맥주를 고를 때마다 그 종류가 너무 많아 공부하는 마음으로 진열장을 훑어 봐야만 했다. 맥주 공부라니 신나는 마음으로 맥주병의 여기저기를 꼼꼼히 살펴보곤 했다. 종류도 많고 알코올(10도가 훌쩍 넘는 맥주까지) 함량도 다양하다. 그런데 마트 마다 다 다른 맥주 컬렉션을 갖고 있고 갈 때마다 새로 출시되었다며 새로운 로컬 맥주들이 나온다. 알고 보니 이 작은 도시에만 70개가 넘는 양조장이 있고 각각의 양조장에서 저마다 다른 수제 맥주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놀라웠던 맥주는 로그(Rogue)란 양조장의 수염 맥주(Beard Beer)다. 포틀랜드 사람들은 수염 기르는 걸 좋아하니까 그런 이름을 붙였나 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진짜 수염으로 만든 맥주였다. 양조장 마스터 존 메이어라는 아저씨의 수염에서 효모를 채취해 1만5천 번 이상의 맥주를 만들었다고 버젓이 병에 쓰여 있다. 이 문구를 읽는 순간 사실 속이 좀 메슥거렸다. 아아, 이 양반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뻔뻔하게도 다음 문장엔 이렇게 쓰여 있다. ‘수염 맥주 맛이 어떨까? 먹어봐. 아마 놀랄걸.’ 내 생각엔 수염이란 사실을 모르고 먹을 때가 더 맛있었던 거 같다.     맥주 한 잔과 나란히 열반 들기 7월부터 다양한 맥주 행사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비건 맥주, 수제 맥주, 유기농 맥주, 국제 맥주, 수입 맥주 등) 각종 맥주 축제를 하는데 고작 서너 개의 축제에 가보고 함부로 말 할 순 없겠지만 거의 다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동네가 좀 다르고 입장료가 천차만별이라는 것 정도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맥주 축제는 윌러밋 강가 공원에서 하는 오리건 맥주 축제다. 주로 7월 말에 하는데 장장 5일 동안이나 한다. 그 규모가 다른 축제들에 비해 훨씬 크다. 입장료 대신 플라스틱 술잔을 사야 하고 토큰을 따로 구입한 후 맥주 트럭들을 돌며 마시고 싶은 맥주를 마시면 된다. 토큰은 하나에 1달러씩인데 잔을 가득 채우는 데는 토큰 4개, 샘플만 받으려면 1개의 토큰이 필요하다. 이 모든 맥주 행사의 특이한 점은 대낮부터 한다는 거다. 맥주 축제니 당연히 저녁 때 시작하리라 짐작했는데, 해가 지면 깨끗하게 끝이 난다. 다들 대낮부터 살짝 취기가 돌아 따뜻한 미소를 아무에게나 남발한다. 인기 있는 양조장의 맥주는 줄을 길게 서서 기다려야 받을 수 있다. 기다리며 모두들 ‘저건 마셔봤냐? 이건 꼭 마셔봐라’하는, 아름다운 음주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축제장 어디에선가 시작된 함성소리가 물결을 타고 우리에게까지 도착한다. 그럼 다 함께 함성을 지르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맥주를 기다린다. 축제니까 평소 안 마셔본 맥주를 마셔보자 작정하고 갔다. 신맛, 단맛, 과일 맛까지 이상하고 다양한 수많은 맥주들이 있었다. 근데 매운 맛과 피자 맛은 좀 괴상했다. 맥주를 마셨는데 뭔가 안주를 많이 먹은듯한 느낌이 드는 맥주들이었다.     ‘맥주천국’이란 말이 있다. 비어(Beer)나 부루어리(Brewery)를 너바나(Nirvana)와 합쳐 ‘비어바나(Beervana)’와 ‘부루바나(Brewvana)’란다. 그러니까 맥주로 열반에 들자는 거다. 열반에 들기 전에 너무 취하지 않을까 걱정이지만, 뭐 다양한 열반이 존재하는 거니깐. 그렇게 이곳 사람들은 이 여름을 맥주와 함께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막바지 여름을 즐기러 지붕 위에서 하는 영화제에 갔었다. 여기저기 지붕 위나 공원에서 야외 영화를 상영하는데, 존 워터스의 <헤어 스프레이>를 상영한다기에 보러 간 것이다. 7시 상영이라서 6시 40분쯤 도착했다. 지붕위로 올라가니 관객들이 별로 없다. 그리고 저녁 7시는 아직 대낮처럼 환하고 뜨거웠다. 예매 사실을 확인하며, 영화를 틀기엔 야외가 너무 밝은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흠, 그렇지?해 지고 틀 거니까 한 9시쯤? 그때까지 기다려야지 뭐.”하며, 느긋하게 말한다. 7시 표를 팔고서는 언제 틀게 될지 모른다며 기다리라니. 하지만 그래도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 그냥 다들 동네 마실 나온 사람들처럼 개까지 끌고 나와 맥주나 마시며 놀고 있다. 같이 맥주를 마시며 디제이가 틀어주는 존 워터스 영화분위기의 음악을 듣고 있자니, 영화상영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된다. 그래. 비어바나다. 열 낼 일이 뭐가 있나. 그냥 같이 맥주열반에 들어봐야지. 아홉 시가 넘으니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더 바랄게 없는 포틀랜드의 한 여름 밤 꿈이었다.PROFILE 동화 작가 선현경(@sunny_7008)은 만능 재주꾼으로 지난해 포틀랜드로 긴 여행을 떠났다. 포틀랜드에서도 변함없이 만화가 남편 이우일(@i00111)과 딸 은서(@e_eunseooo), 고양이 카프카를 관찰하면서 별탈 없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