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올림픽이 한창인 가운데, 금메달리스트나 각본 없는 드라마의 주인공 못지않게 이슈가 된 인물이 있다. 8월 6일, 한국과 일본의 여자 배구 경기. 여자 배구 대표팀의 김연경 선수가 실점을 아쉬워하며 큰소리를 내지르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을 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안타까움을 담아 외친 ‘식빵’! 그 순간은 불과 몇 분 만에 ‘짤방’으로 만들어져 SNS를 뒤덮었다. 젊은 여성이 경기 중에 욕설을 했으니 대중이 이 일을 어찌 받아들일까. 하지만 소위 ‘까는’ 반응이 나올까 하는 걱정은 완전히 쓸데없는, 고루한 생각에 불과했다. “언니 멋져요!” “덕통사고(덕질할 만한 대상을 발견해 반했다는 뜻) 당했습니다.” “김연경 걸 크러시 쩔어!” 자기 분야에서 실력으론 뒤질 게 없으면서 확실하고 강하게 의견을 주장하는 자신감 가득한 여자, 전형적인 ‘예쁨’보다 그만의 개성으로 아름다움의 지평을 넓히는 여자들에 대한 지지와 선망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요즘 유행하는 ‘걸 크러시’다. 물론 예전에도 강한 여성에 대한 선호는 존재했다. 그러나 과거엔 주로 직장 여성들의 롤모델로서 ‘커리어 우먼’에 국한된 것이었던 반면 요즘의 걸 크러시, 소위 ‘센 언니’들에 대한 지지는 특정 분야를 뛰어넘어 대중문화 전반을 뒤덮고 있다. 진행자부터 게스트까지 남자들로 뒤덮인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센 언니들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진다. 유행의 시작은 M.net의 <언프리티 랩스타>다. <언랩> 출연자들은 경쟁 상대를 향해 거침없는 ‘디스’ 를 내지른다. 상대의 외모나 실력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으며 그 비판은 자신을 판단하는 대중들, 나아가 팬들에게도 가차없다. 첫 번째 시즌에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우승자 치타와 제시는 ‘니들이 뭔데 날 판단해?’라는 멘트 하나로 출연자들을 평정한 것은 물론 대중의 여성 연예인에 대한 시각에도 일침을 날렸다. 아이돌이 주류인 한국 가요계에서 힙합, 그것도 여성 래퍼는 마이너 역할 정도에 머물러 있다는 편견이 정설. 그 속에서 등장한 여성 래퍼들의 실력과 매력, 존재감은 신선하고 강렬했다. 현재 이 프로그램이 시즌 3까지 제작된 것만 봐도 시청률과 이슈 메이킹 측면에서 이 여자들이 얼마나 대중의 사랑을 받았는지 충분히 증명된다. 개그우먼 김숙은 또 다른 걸 크러시를 불러일으켰다. “남자가 조신하게 살림을 잘해야지” “아침부터 남자가 큰소리 내고 있어, 짜증 나게” “이제는 가모장제” 같은, 기존 남녀의 성 역할을 반전시킨 발언으로 ‘숙 크러시’란 하위 장르까지 열었다. JTBC의 <님과 함께-최고의 사랑>은 방송 초반 <우결>의 ‘짝퉁’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절하 속에서 신선함이라곤 기대할 수 없는 출발을 했다. 하지만 가상 부부로 출연한 김숙은 상황을 주도하는 추진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청자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처음엔 무심코 그냥 웃어넘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뼈 있는 농담을 던지는 그녀에게 시청자(특히 여성)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김숙의 그런 모습은 스스로 경제력과 자립 능력을 갖춘 여자 개그맨으로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악플도 불사한 채 남자한테 잘 보일 목적의 애교와 개인기를 장전하지 않은 결과다. tVN 드라마 <굿와이프>는 동명의 미국 원작 TV 시리즈가 있었기에 비교 분석을 피할 수 없었다. 주인공 김혜경은 미드 원작에 비해 창백하고 연약해 보이는 외모다. 스타일링 또한 화려하고 여성스럽다(기존 법정 드라마의 여성 변호사들이 검은 정장만 입었던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불륜을 저지른 남편에게 “꺼져”라며 단호하고도 통쾌한 말을 내던지고, 자력으로 변호한 인물을 보호하며, 주위의 어떤 남자에게도 기대지 않은 채 세상 속에 당당히 나서는 모습은 외모와 대비되어 캐릭터의 강인한 내면을 더욱 부각시켰다. 점점 더 강하고 주체적인 개인이 되어가는 한 여자의 변화가 남자의 도움이나 ‘막장’ 요소 없이 온전하게 그려졌던 경우가 한국 드라마 역사에서 있었던가? 아무리 곱씹어봐도 잘 떠오르지 않기에 <굿와이프>의 시도가 반갑고 고마울 지경이다. 센 언니들이 여기저기서 유행하니 아예 그 캐릭터들을 집대성한 예능 프로그램도 탄생했다. 라미란, 제시, 김숙, 홍진경뿐 아니라 청순가련한 이미지의 배우 민효린과 소녀시대의 티파니까지 출연하는 KBS2 TV <언니들의 슬램덩크>가 그것이다. 실제로 이 사람들이 모였을 때, 방송 불가 영역의 거침없는 멘트나 주고받고 기싸움만 했더라면 센 언니들은 그냥 무서운 여자들로 보쌈당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컨셉트는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 여자들이 서로의 꿈을 이뤄준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자기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꿈을 당당하게 말하고 여자들끼리 연대와 도움으로 어떤 성취감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이 뻔하디뻔한 시나리오가 오직 여자들만의 것인데도 신선하다는 게 여자 입장에서는 서글플 따름이다. 걸 크러시는 프로그램 속 캐릭터와 배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가려져 있던 평소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을 때 더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배우는 돈이 급할 때 제일 연기를 잘한다”와 같은 발언으로 ‘윤여정 어록’까지 회자되는 배우 윤여정이 그렇다. “인생은 60이 되어도 몰라, 나도 67살은 처음이거든” 같은 말을 방송을 통해 여자에게 들어본 적 있나. 30여 년 경력의 배우로서, 결혼과 외국생활, 이혼과 싱글맘으로서의 삶 등을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낸 윤여정의 말에는 가식이 없다. ‘돈에 초연해야 해, 여자들은 조신해야 해, 가정을 꾸리고 행복해져야 해.’ 사회의 가식을 부수는 진실과 경험이 있기에 윤여정이 언니들의 왕언니로 인정받는 것은 아닐까. 최근 에 이어 <더 바디쇼>에서도 외모와 다르게 털털한 모습으로 거침없는 발언을 이어가는 채정안도 그녀에게 입혀져 있던 이미지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여자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게 됐다. 최근 몇 년간 연예계의 트렌드는 꾸준히 바뀌었지만, 시청자들이 기억할 만한 모습은 예능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남자들이 우르르 모여 게임하고 운동하고 요리하고 여행 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간 볼 만큼 본 탓에 이런 프로그램은 이젠 식상하기까지 하다. 그 속에서 마치 틈새시장처럼 그냥 막 나가기로 한 여자들이 센 언니 캐릭터를 소비하기만 했더라면 크게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여자들을 보는 많은 여자들이 응원하고 동조하고 기꺼이 사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의 센 언니들에게는 그녀들의 캐릭터를 납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서사’가 있다. 이적 문제로 배구협회와 길고 지루한 싸움을 견디면서 세계 최고의 실력을 발휘한 김연경, 긴 무명 시절과 못된 남자들의 외모 비하를 견뎌내면서도 주눅 들지 않는 김숙, 남자들에게 섹스어필하지 않고 자신의 랩과 스타일에 집중하는 제시와 치타, 천하가 알 만큼 요란했던 결혼과 이혼 과정을 쿨하게 말하되 주부 대상 아침 프로그램에서 하소연하지 않았던 윤여정. 그녀들의 모습은 일상에서 치이며 마음껏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수많은 여자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준다. 그런 히스토리가 있기에 요즘의 센 언니들은 이전의 어떤 언니들과 다르다. 미디어에서 껌 좀 씹고 침 좀 뱉어본 여자 정도로 센 언니를 연출하던 시대는 지났다. 제대로 센 언니들은 지금 그 힘을 모아 이 세상을 바꾸는 데 쓰고 있는 것이다. who's she김선 <코스모폴리탄>을 시작으로 몇몇 매체의 피처 에디터로 일하다가 국회 보좌진이 되어 별안간 정계에 입문(?)했다. 몇 번의 선거를 치르고 많은 정치인을 만나며 몇 권의 책도 만들었다. 현재는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으로 잡지와 방송을 통해 최신 여론을 해설하는 일을 한다. 정치와 패션의 관계를 글로 써보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