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가를 위한 아지트 | 엘르코리아 (ELLE KOREA)

건축가가 물었다. 작은 아지트를 만들면 어떨까요? 아늑한 구석자리, 햇빛 그리고 좋은 책. 가장 완벽한 세 가지가 모여있는 공간, 리딩 누크가 그렇게 탄생했다.::김자혜,하동,지리산,시골집,건축,레노베이션,건축가,집,엘르,elle.co.kr:: | 김자혜,하동,지리산,시골집,건축

“자혜야, 세상에서 가장 살만한 것은 책이란다.” 언젠가 나의 엄마가 말했다. 살까 말까 고민될 때 사도 후회가 없는 것, 담긴 내용에 비해 가장 저렴한 것(물론 모든 책이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이 바로 책이라는 거다. 그 신념 탓에 엄마 곁엔 늘 어마어마한 양의 책이 있었다. 엄마가 처녀였던 시절 모았던 문학 작품들, 그리고 결혼한 뒤 사들인 기독서적들. 성인이 되기 전 읽기가 금지되었던 최승자와 전혜린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책이 허락되었고, 엄마의 책을 읽는 일이 난 좋았다. 엄마가 그어둔 밑줄을 보는 것도, 옛날 책의 쿰쿰한 냄새를 맡는 것도 좋았다. 젊은 엄마에게 어떤 오빠가 선물하며 책 첫장에 적어둔 메모를 발견한 날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굴까, 누구였을까 상상하느라. 아버지의 사업이 흥하고 쇠하고, 집이 넓어졌다가 다시 좁아지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엄마의 거대한 책 무더기는 사라지지 않고 늘 집안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 십수번의 이사를 거치며 십수번 포장되고 다시 풀어졌다. 책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므로 책을 사들이는 건 내게 당연한 일이었다. 독서량은 대학생 때 가장 많았으나 책 수집이 시작된 건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다. 내 공간에 내가 좋아하는 책을 쌓는 건 흐뭇한 일이다. 좋았던 책을 다시 꺼내 읽을 수 있고, 이전에 남긴 밑줄이나 메모를 만지며 그때의 기분을 떠올릴 수도 있다. 책꽂이에 가득 꽂고도 넘쳐 여기저기 쌓여있는 책을 어딘가에 잘 정돈하고 싶었지만, 드라마 속 실장님들의 서재가 욕심났던 건 아니다. 좀 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공간을 원했다. 바로 그 때 건축가가 제안한 것이 집안 서쪽의 창가자리에 고정형 창을 만드는 것이었다. 거실과 구분되는 벽을 세우고 그 안에 책장을 만들자고 했다. 방은 아니지만 독립된 느낌을 주는 아늑한 공간, 나의 리딩 누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왼쪽)가장 경치가 좋은 서쪽에 창을 내기로 결정했다. 지붕 공사와 조적(벽돌쌓기)을 마친 모습. (오른쪽)단열 공사 중인 모습.사실 ‘아지트’는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욕구 중 하나다. 커다란 우산을 펼쳐두고 그 밑에서 언니와 놀고 있는 사진(대체 어떻게 둘 다 들어간거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초등학교 근처 공사장에 천막을 쳐두고 은밀한 공간을 만들어 친구들과 각자의 물건을 가져다 두었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록색 지붕집의 빨강머리 앤! 그녀의 남루한 다락방이 내겐 가장 큰 로망이었다. 창가에 걸터 앉아 책을 읽거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럼, 안녕히 계세요!”로 끝나는 기도를 하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다락방은 아니지만 저 멀리 산이 보이는 아늑한 공간이 생겼으니, 이젠 나도 앤처럼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중얼거려봐야지.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창문이 있는 아지트에 관한 로망을 심어준 <빨강머리 앤>(왼쪽)굳이 열고 닫을 필요가 없고, 창문 중간에 선이 생기는 것이 싫어 고정형 창문으로 결정했다. 창호공사가 끝난 뒤 목공사중인 모습. 거실과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좁은 벽을 설치했다. (오른쪽)전기공사와 마루시공 후 완성된 모습.입주 후의 모습. 집의 지대가 높아 창가에 앉으면 옆집 지붕과 지리산 자락이 보인다.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