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s editor KIM EUN HEE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여행을, 관광보다 관찰을 좋아한다. 낯선 도시의 일상적인 풍경을 사랑한다. 낡고 오래된 것을 아낀다. 특히 100년쯤은 기본인  오랜 건축과 장소, 무엇 앞에서는 들여다보고 만져본다.산 마르코 광장 입구.베니스의 지붕은 전부 붉은색이다.베니스의 흔한 일상 풍경.자동차 대신 보트가 ‘주차’돼 있다.전망대가 있는 산 마르코 종루.만조인 ‘아쿠아 알타’ 때의 광장. 도심에 물이 사람 무릎까지 차오른다.베니스 본섬과 마주한 산 클레멘테 섬의 호텔.약 16시간의 비행을 거쳐 도착한 여행지. 유럽의 관문인 이스탄불에서 한 번 경유해야 했지만 촘촘하게 안배된 터키항공의 스케줄 덕분에 직항으로 비행해 온 듯 산뜻하게 맞이한 타국은 주위를 가늠하기 힘든 늦은밤이었다. 이국적인 정취를 만끽할 새도 없이 마중 나온 호텔 직원과 함께 공항을 나섰다. 조금 가야 한다며 싱긋 웃는 그와 5분여 정도 걸었을까? 호텔로 향하는 교통편을 타기 위해 도착한 남다른 정류장을 보고 나서야 내가 어디에 당도해 있는지 실감했다. 바닷물에 출렁이는 선착장이 정류장인 이곳,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선 보트를 타야 하는 이곳은 ‘물의 도시’ 베니스였다. 다음날 아침, 베니스 본섬과 20여 분 거리인 산 클레멘테 섬의 호텔 마당에서 마주한 베니스의 풍경은 여느 섬나라와 달랐다. 분화구 위, 파도를 피해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듯한 섬들과 달리 베니스는 그 몸을 쭉 펼쳐놓은 듯 막힘이 없었다. 보트를 타고 본섬에 다가갈수록 물 위를 유랑하듯 떠 있는 도시의 위용이 가까워졌다. 브래들리 쿠퍼를 닮은 보트 기사는 베니스에 처음 왔는지 물었다. “베니스는 원래 석호였어요. 침략해 오는 훈족을 피해 이탈리아 본토인들이 도망와 물 위에 말뚝을 박고 흙을 부어 만든 땅이죠.” 1500여 년 전인 567년의 일이다. 자연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마련한 토대, 그 위에 쌓아 올린 역사와 문화. 베니스에 대해 곤돌라 밖에 몰랐는데. 보트에서 내려 베니스를 디딘 발 아래가 아득해졌다. 베니스 본섬 여행의 시작이자 중심은 산 마르코 광장이라 해도 무방하다. 베니스를 다스린 총독들의 공식 주거지인 두칼레 궁전과 성 마르코 대성당 등 베니스의 정치, 종교, 문화의 상징물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광장 입구에는 대문처럼 기둥 두 개가 높이 솟아 있는데 이곳 터줏대감들은 두 기둥 사이를 지나가면 재수없다고 여긴단다. 사자상인 기둥은 베니스의 수호 성인 마르코의 상징이고 그 옆의 기둥은 마르코에게 영광을 빼앗긴 과거의 수호 성인 성 테오도르 상이라서 그 사이를 지나면 테오도르의 저주가 따른다는 것이다. 미신에 코웃음 치며 기둥 사이를 피해 광장에 입성했다. 탁 트인 보통의 광장과 달리 3면이 ‘ㄷ’자 형태의 석조 건축물로 둘러싸인 광장은 과연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극찬할 만했다. 비잔틴 양식과 르네상스 건축양식이 뒤섞여 화려한 궁전과 성당을 마주하고 있는 광장에는 노천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베니스의 상인들, 여행자들의 활기가 일렁거렸다. 돌아보면 일정 중 하루는 산 마르코 광장에 종일 앉아 있어도 좋을 걸 그랬다. 괴테와 프루스트, 찰스 디킨스가 앉아 커피를 마셨다던 ‘카페 플로리안’에서는 턱시도 차림의 음악가들이 악기를 연주했고, 과거 베니스의 부를 자랑하고자 금박으로 장식한 궁전은 햇빛에 반짝거렸다. 해가 지면 영화처럼 모든 불이 탁 켜지던 순간도, 여행 마지막 날 밤 우연히 겪은 ‘아쿠아 알타(만조)’의 경이로움도, 산 마르코 광장이 선사한 인생의 기쁨이었다. 광장에서 출발해 찾아가야 할 다음 본섬 여행지를 추천하자면, 없다. 베니스 본섬에 첫 번째로 놓인 다리 리알토, 나무로 만들어진 아카데미아 다리, 중세 회화미술의 정수가 담긴 아카데미아 미술관, 오페라의 종주국 이탈리아다운 화려한 극장 라 파니체, 그 앞에 자리한 유서 깊은 레스토랑이자 생선 요리가 기막힌 ‘앤티코 마티니(Antico Martini)’ 등 가봐야 할 명소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나는 베니스에서 단 한 번도 지도를 보지 않았다(사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 갈 때 한 번, 숙소로 돌아올 때 한 번 보기는 했다). 베니스의 명소들은 전부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다 만났다. 크고 작은 118개의 섬이 400여 개의 다리들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베니스 본섬은 어디로 가든 어딘가에 닿는다. 조밀하게 들어선 건물은 굽이굽이 골목을 이루고, 골목을 헤맬 때마다 베니스의  깊은 매력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걷다 다리가 아파 들어선 성당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고요해서 아름다웠고, 배가 고파 거리 상점에서 사먹은 조각 피자의 토핑은 알고 보니 정어리라서 뿜고 말았다. 우연히 마주친 빈티지 소품 숍에선 베니스 골목 풍경의 미니어처를, 베니스 유일의 비틀스 숍이라는 곳에선 ‘Hey Jude’가 흘러나오는 오르골을 샀다.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셨고(베니스의 에스프레소는 정말 맛있다), 서점에 들어가 읽지도 못하는 책을 후루룩 넘겨보기도 했다. 그러다 닿은 어느 박물관은 입장료가 너무 비싸 입구를 서성거렸지만. 이것이 여행이었다. 여행길에 지나쳐온 이 작은 공간들을 다시 찾아가라고하면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한국에선 지도를 보지 않으면 옆동네도 찾아가지 못할 정도로 길치니까. 하지만 12시가 되면 사라지는 곳에 다녀온 것처럼 베니스 골목 깊숙이 추억을 숨겨두고 온 기분은 나쁘지 않다. 베니스에서는 헤매어 보기를. 다시 갔을 때 다르게 마주하게 될 베니스의 얼굴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베니스에서는 길을 잃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