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s editor KIM NA RAE‘정처없이 거리를 헤매다 지금 내 인생의 맥락과 가장 어울릴 이야기를 실어오리라’는 믿음을 지닌 이기적인 여행자. 비엔나는 그 믿음에 충실했던 땅이자 살고 싶은 계절과 나누고 싶은 이들을 지닌 포근한 도시.비엔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프라타의 대관람차.품위 있게 잘 정돈된 시가지 풍경. 비엔나는 꽃과 숲이 많은 산책의 도시.레오폴드 미술관이 자리한 MQ 가운데엔 분수와 디자인 의자가 놓인 광장이 있어 마음대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미술관과 다름없는 호텔 자허.귓병을 앓던 베토벤이 머물렀다는 ‘호이리거 마이어’ 인근 포도밭.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쓰인 쇤부른 궁전.어딘지 동떨어진 섬처럼 느껴지는 낯선 동유럽 소속의 도시는 ‘음표의 왕국’이라 접했으나 그 실체를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가 드물었다. 오히려 비엔나에 대한 환상을 키워준 건 영화 <비포 선 라이즈>다. 부지런히 도시 이곳 저곳을 데이트 장소 삼아 쏘다닌 커플 덕분에 유럽 최초의 유원지가 프라타(Prater)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됐으니까. 언젠가 주인공들이 입맞춤을 나눈 대관람차 뒤로 느리게 물들어가던 주홍빛 하늘과 대면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세월이 흘러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까지 거쳐 나 역시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에서 서른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가 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한 비엔나는 격정적인 열정 대신 마음의 번뇌를 가라앉히는 포근한 숨결이 느껴졌다. 비엔니즈는 특별한 기억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평범한 일상을 살 때 생긴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대체로 걸어서 이동하고, 식사와 디저트 그리고 커피가 함께하는 대화를 중요시하고 주말엔 자주 숲으로 나갔다. 여행보다 오래 머무르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일렁거리는 도시였다. 짧지만 머무르는 동안엔 비엔나 사람처럼 도시가 이끄는 대로 마음대로 거닐어보기로 했다. 독일어 지명이 낯설어서 그렇지 비엔나처럼 슈트라세(거리)와 가세(골목길)가 잘 연결돼 걷기 좋은 곳도 없다. 마침 구도심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호텔 자허(Hotel Sacher)가 숙소라는 것도 걷기 플랜을 세우기엔 최상의 조건이었다. 참고로 이 호텔은 엘리자베스 여왕 2세를 비롯해 니콜라스 케이지, 샤론 스톤, 리한나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유명 인사들이 투숙한 이력을 품고 있는 곳으로 객실과 복도를 비롯해 호텔 전체에 예술 작품들이 걸려 있어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비엔나에서 반드시 먹어봐야 할 초콜릿 케이크 ‘오리지널 자허 토르테’도 호텔 1층 카페에서 처음 개발했다). 그리하여 여정 첫날, 목적지로 점 찍은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으로 향하는 길에 직선 거리인 케른트너를 포기하고 그 끝의 풍경을 짐작할 길 없는 골목길 여러 개를 일부러 거쳐 돌아갔다. 모차르트가 연주회를 했던 카페 프라우엔후버, 지금은 백화점이 돼버렸지만 그가 죽음을 맞이했던 집, 안토니오 살리에르가 악상을 연구했던 집…. 성격이 괴팍해 비엔나에 살며 이사만 수십 번 한 베토벤 하우스(여러 집 중 하나)까지 중세 골목이 품고 있는 기억들과 우연처럼 마주쳤다. 비옥한 비엔나의 일상 풍경에 한껏 빠져들었다 다다른 슈테판 대성당은 ‘거인의 문’이란 문턱을 넘고 보니 천정과 기둥, 바닥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새겨진 조각과 장식을 살펴보느라 쉬지 않고 고개를 움직여야 했다. 여기 사람들은 푸메린 종이 매달린 북탑에서 바라보는 비엔나 풍경이 진정한 대성당의 하이라이트라 했다. 그래서 나도 한번 올라가봤다. 수만 장의 알록달록한 타일로 장식된 화려한 지붕 아래로 ‘골든 유(비엔나 최고의 번화가로 U자 형태로 게른트너-그라벤-콜마르크트 거리가 연결된 모습)’가 근사한 실루엣을 펼쳐보였다. 꼭 1:100,000으로 축소한 지도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멀리 합스부르크 왕궁의 우아한 쿠폴라(돔)도 눈에 들어온다. 비엔나는 널찍한 순환대로 ‘링 스트라세’가 중심을 감싸고 있고, 그 길을 따라 공공 건축물과 왕궁, 박물관 등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건물 사이사이엔 식물 정원이 빼놓지 않고 자리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녹색 지대’라고 봐도 될 정도. 몇 번이나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걷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구석구석 걸어서 도시를 돌아보는 와중에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풍경은 방대한 규모의 합스부르크 왕궁도, 쇤브룬 궁전(Schonbrunn Palace)도 아니었다. 한 때 왕가의 마구간과 승마연습장이었던 곳을 형태만 남기고 미술관, 공연장, 카페 등이 모인 문화예술단지로 고쳐 지난 2001년에 개관한 뮤제움 콰트리어(Museums Quartier). MQ 또는 뮤지엄 지구라 불리는 이곳엔 비엔나에서 흥미로운 커리어를 남긴 채 떠난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레오폴드 미술관이 속해 있다. 19세기 말에 비엔나에서 활동한 클림트, 코코슈카의 작품 속에서 툭 하고 놓여 있는 에곤 실레의 섬세하고 뜨거운 붓질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시작됐다고 하니 시공간을 관통하고 선 듯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의외로 비엔나의 숨은 재미는 먹는 데 있었는데, 국물 음식이 없는 것만 빼면 비너 퀴셰(Wiener Kuche)는 입맛에 잘 맞았다. 평화로운 도시의 응접실 같은 MQ를 지나 찾은 글라시스 바이즐(Glacis Beisl)은 로컬들만 알고 즐겨 찾는 레스토랑. 입구만 보면 화원인 줄 착각하기 쉽지만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타고 조금만 들어가면 담장 식물이 길게 늘어진 야외 테이블에 앉아 타펠스피츠(Tafelspitz)를 앞에 둔 느슨한 모습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풍경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참고로 매 끼니 와인을 마시다 알게 된 사실은 도시 한가운데에 와이너리가 있는 건 비엔나가 거의 유일하다는 것. 비엔나 북서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곳은 녹지대로 나무들이 우거진 언덕에 포도나무가 자란다. 그리고 이 포도나무 사이엔 ‘호이리거’라 불리는 그 해에 나온 새 와인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 이제 대망의 대관람차에 오르는 일만 남았다. 프라타는 내내 걸어다닌 구도심에서 벗어난 카페 구역에 위치해 마침 근처의 카페이자 각종 아날로그 문물을 수집해 둔 컨셉트 스토어인 ‘슈퍼 센스’를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사진을 플립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주거나, 직접 부른 노래를 LP판으로 만들어주는 체험 공간을 마련해 두고 있어 비엔나가 유물만 붙들고 사는 낡은 도시가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곳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대관람차에 탑승하는 순간, 저 너머에 도나우 강이 펼쳐졌다. 균형과 조화가 완전한 도시의 얼굴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