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게임부터 부동산 투자 프로그램, 의료 산업 그리고 교육까지, 현대인의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온 ‘가상현실’ 기술. 이런 식이라면 언젠가 이 놀라운 IT 신기술이 인간의 성생활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지금까지 섹스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원초적인 방식만으로도 성적 쾌락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1800년대, 의사들이 여성의 히스테리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바이브레이터가 현대에는 색다른 섹스나 자위에 이용되고 있지만 전통적인 섹스 방식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방수용 바이브레이터인 지미 제인(Jimmy Jane) 사의 ‘폼 2(Form 2)’, 진동 단계를 선택할 수 있는 레로(Lelo) 사의 ‘네어(Nea)’ 등 나름의 기능을 탑재한 제품들도 일부 마니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에 그쳤다. 하지만 최근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Rift)’ 같은 신생 VR 기기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VR 기기는 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사용자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준다. VR 기기를 통해 보는 고화질의 입체 영상은 인간의 오감을 속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하다. 이는 뜨거웠던 지난밤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고도 궁극의 성적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기업들이 가상현실에 최적화된 VR 섹스 기구들을 앞다퉈 개발, 출시하고 있다. 섹스 토이 제조사인 로벤스(Lovense)는 여성을 위한 바이브레이터 ‘노라(Nora)’와 남성을 위한 자위 기구 ‘맥스(Max)’를 세상에 내놨다. 노라와 맥스만 있으면 파트너가 없어도 진짜 같은 섹스를 즐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장거리 연애 중인 커플이 스카이프나 페이스 타임으로 영상 채팅을 하면서 서로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침대에서 상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정작 본인이 원하는 것은 숨기는 경우가 많다. 섣불리 독특한 성적 취향을 드러냈다가 섹스 파트너에게 ‘변태’ 취급을 당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VR 기기를 사용하면 자극의 정도와 방식을 마음대로 선택하고 원하는 외모의 파트너와 사랑을 나누는 등 신기술의 혜택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로벤스 사의 마케팅 매니저의 말처럼 VR 기술과 섹스 산업의 합작품이 남녀 모두의 성적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켜 주는 역사적인 물건이 될 수 있을까? 실제 구매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들지만 로벤스 사 외에도 다양한 회사들이 가상현실을 접목한 제품들을 출시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런던의 미스터리 바이브(Mystery Vibe) 사는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형태를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는 진동기 ‘크레센도(Crescendo)’를, 서니 앨런(Sunny Allen) 사는 여성의 질 내의 압력과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를 장착해 맞춤형 자극을 전달하는 ‘흄(Hum)’을 개발했다. 또 오르가스매트로닉스(Orgasmatronics)는 질 입구에 올려놓기만 해도 클리토리스 전체에 진동이 전해지는 동글납작한 모양의 ‘X2 오르가스매트론(X2 Orgasmatron)’을 출시하고 기계와 친하지 않은 여성들도 쉽게 조작법을 익힐 수 있도록 영상 사용설명서까지 제작, 브랜드 공식 유튜브 계정에 공개했다. 이처럼 VR 기술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고 빠르게 섹스 산업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래학자 이언 피어슨(Ian Pearson)은 9년 후쯤에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섹스 로봇을 볼 수 있을 것이며, 2050년 이후엔 인간과 인간의 섹스보다 로봇을 이용한 섹스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인간은 이미 로봇이나 기계들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 영화 <스타워즈>의 ‘R2-D2’를 생각해 보라.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로봇이 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통할 수 없는 사람보다 더 나은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섹스와 테크놀로지가 접목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반면 전자식 엔터테인먼트 기기들이 성적 만족을 채워 줄 것이라는 기대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있다. 영국 드 몽포르(De Montfort) 대학의 로봇학자 캐서린 리처드슨(Kathleen Richardson)은 ‘인간과 로봇의 상호작용이 가진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섹스 로봇의 출시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섹스 로봇은 무분별한 섹스 산업과 남녀 불평등의 부산물이다. 이런 식의 섹스는 여성 폭력의 또 다른 형태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가까운 미래에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를 부추기는 섹스 로봇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리처드슨은 기술의 발달로 인간을 대체하는 기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몸과 몸이 만나 소통하고 기쁨을 느끼는 섹스마저 기계로 대체된다면 결국 현대인은 공감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간관계 카운슬러인 베나 람팔(Vena Ramphal)은 이런 변화에 따른 위험성은 가상현실 자체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오큘러스 리프트라는 기계 이름에 이미 ‘균열’ ‘갈라진 틈’을 뜻하는 ‘리프트(Rift)’라는 말이 포함돼 있다. 이처럼 VR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우리 신체와 경험 사이에 균열을 만든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여성들이 VR 섹스를 통해 현실에서 억제해 왔던 욕망을 표출하고 새로운 욕구를 발견하게 될지는 몰라도 그럴수록 가상과 현실은 점점 분리될 것이다.” 그의 말처럼 가상현실로 얻은 만족감이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하더라도 결국 그건 가상의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같은 가짜가 주는 달콤함과 평범하지만 진짜인 것 중 어떤 게 더 나은 선택일까. 혼자 보내는 화끈한 밤 혹은 장거리 가상 섹스, 어떤 것이든지 섹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남녀 모두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 소외 현상과 성적 대상화를 부채질한다는 것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로봇에게 “나와 함께 밤을 보내 주겠냐”고 물어보는 대신, 그저 ‘동작’ 스위치만 누르면 되니까 말이다. 이런 행동에 대한 당위성이 결국 남녀의 사랑에 치명적인 오류를 남기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지난해 <가디언> 기자 스튜어드 헤리티지가 남긴 유명한 말처럼 VR 섹스가 ‘세계평화의 새 시대’를 선사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활용법과 장단점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