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가정식은 가라 | 엘르코리아 (ELLE KOREA)

트라토리아 혹은 오스테리아, 비스트로, 브라세리, 이자카야 혹은 주방 등. 요즘 홍대나 청담동, 압구정 일대에 새로 생긴 음식점 간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어들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이 단어들이 가진 의미를 우리식대로 표현하면 '가정식' 정도쯤 된다. :: 엘르,엣진,elle.co.kr :: | :: 엘르,엣진,elle.co.kr ::

트라토리아 혹은 오스테리아, 비스트로, 브라세리, 이자카야 혹은 주방 등. 요즘 홍대나 청담동, 압구정 일대에 새로 생긴 음식점 간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어들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이 단어들이 가진 의미를 우리식대로 표현하면 '가정식' 정도쯤 된다. 한식당 중에서도 엄마 밥상, 소박한 밥상, ㅇㅇ식당류가 있는 것처럼 이탈리아에는 트라토리아나 오스테리아, 미국에는 비스트로, 프랑스에는 브라세리(혹은 비스트로), 일본에는 이자카야 등이 있다. 그런데 요즘 부쩍 소박한 가정식이 유행하게 된 이유는 뭘까? 경제 불황 때문이다. 주머니 사정이 녹록치 않은 대중들이 한끼에 10~30만원씩 하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음식을 부담스러워하는 건 당연지사. 따라서 정통 프렌치나 이탤리언 코스 요리, 가이세키 대신 소박하고 푸짐한 '집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음식점 입장에서 이익을 적게 보고 많이 파는 '박리다매'식을 더 선호하게 된 이유도 마찬가지다. 레스토랑 운영비와 서비스 비용 등이 반영된 높은 가격의 음식을 적게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것보다는 저렴한 음식을 대중적으로 많이 파는 것이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가정식 레스토랑들은 그들의 컨셉트를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집밥처럼 만들어 놓고 가격은 파인 다이닝 수준으로 받길 원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코멘트. '이탈리아 00 지방에서 요리를 공부한 셰프의 추억이 담긴 음식들', '집에서 먹는 밥처럼 건강하고 신선한 재료만을 사용', '그 지역 고유의 특성이 반영된 정통 레서피' 등. 사실 냉정하게 따져보라. 우리가 집밥 먹을 때 어머니의 요리 경력이나 요리에 쓴 식재료, 정통 레서피가 궁금했던 적이 있는가? 사실 가정식을 내는 식당은 식재료와 인테리어, 서비스 등에 과장된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집밥 같이 소박하고 건강한 음식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한다. 파인 다이닝에서 비싼 식재료와 스태프의 서비스, 고급스럽게 치장한 인테리어, 비싼 임대료 등을 식대에 포함하여 높은 가격을 매기는 것은 어느 정도 수긍할만한 이유라도 있지만 가정식 식당에서 요리에 비싼 가격을 매기는 데는 냉정하게 말해서 이렇다 할 변명거리가 없다. 아무리 실력 있는 셰프의 손길이 닿았다 해도 말이다. 한눈에 봐도 평범하고 저렴한,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 소박한 식기류와 인테리어, 특별할 것 없는 서비스 등에 손님들이 파인 다이닝 수준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못 자리잡은 파스타 가격을 따져보자. 사실 이탈리아는 요리에서 파인 다이닝과 가정식의 차이가 가장 적은 곳 중 하나다. 요리에 향토성이 강하게 반영되기 때문이다. 특히 파스타는 이탈리아 어느 지역을 가도 소박하게 즐기는 대중적인 음식이다. 이런 이탈리아 가정식 메뉴가 유난히 한국에서만 비싸게 팔린다. 따라서 고급에 속하는 리스토란테든 가정식 식당에 속하는 트라토리아든 파스타 가격만큼은 모두 1~2만원대의 가격으로 상향 평준화가 되었다. 리스토란테에서는 서비스와 인테리어, 캐비어나 송로 버섯 등의 고급 식재료가 파스타에 더해지는 것으로 비싼 가격을 받을 이유라도 생기지만 가정식을 표방한 곳까지 파스타를 그 가격대로 판매할 이유가 없다. 얼마 전 홍대 앞에 문을 연 어느 프렌치 비스트로를 취재하면서 들은 오너 셰프는 이런 말까지 했다. '국내에서 파스타 가격이 그렇다보니 프렌치 가정식을 내는 이곳에서도 파스타를 팔지 않을 수 없다.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집에서 파스타는 손님들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다.' 아직도 손님을 미끼 혹은 봉으로 생각하는 식당이 많다니. 더구나 가정식을 표방한 식당에서 말이다. 얼마나 화가 날 일인가? 환경공학을 전공하고 웹디자인을 공부하다가 스물 여섯 늦은(?) 나이에 문득 '요리해야지'란 생각이 드는 순간 유학을 결심하고 10개월 동안 준비해 뉴욕 C.I.A. 요리학교에 입학했을 때, 난 영어가 변변치 않아 의도하지 않게 과묵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학생이었다. 선생님들이나 학교 친구들은 아마 내가 벙어리인줄 알았을 거다. 영어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덜컥 학교에 지원한 것이 뼈저리게 후회되기도 했지만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던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C.I.A. 요리학교는 3주마다 신입생이 입학하는 21개월 과정의 촘촘한 커리큘럼으로 진행된다. 휘몰아치듯 새로운 스케줄이 진행되고 학생들은 매주 과제와 퀴즈, 시험, 인턴쉽 과정을 치르면서 요리에 대한 지식과 스킬은 물론 레스토랑 운영에 대한 매니지먼트까지 모든 분야를 배운다. 처음엔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화장실에 가서 울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적응하고 물러설 곳 없이 부딪혀보자는 심정으로 다가서니 '작은 동양인 여자애'에 대한 시선에서 점차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외롭고 힘든 유학시절 나에겐 속 깊은 게이 친구가 하나 있었다. 같이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힘들 때 서로 도와주던 친구 데스. 학교를 졸업하기 한 달 전, 레스토랑 익스턴십을 위해 뉴욕의 북동쪽 어퍼 이스트 사이드로 이사를 했다. 주말마다 부지런히 친구들 차로 짐을 날랐는데 3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사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때 데스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사를 했을까 싶다. 고마운 마음에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 중 하나인 '블레이'에서 밥을 사기로 했다. 블레이는 뉴욕 레스토랑에 프랑스 요리의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운 변화의 과정에 가장 크게 기여한 데이비드 블레이가 오너 셰프로 있는 유명 레스토랑이다. 평소 꼭 먹어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하고 언젠가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키운 곳이기도 하다. 그때 메인요리로 나왔던 것이 바로 허브 브로쓰. 허브 브로쓰는 우리나라로 치면 국물요리라고 할 수 있는데 허브를 잔뜩 넣은 스프라고 보면 된다. 깔라마리와 관자, 새우와 허브 브로쓰의 조화가 너무 신선했다. 블레이에서 환상적인 식사를 마친 나는 졸업 후 이력서를 냈고 운 좋게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16시간을 꼬박 일하는 것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었다. 많은 서러움을 겪은 끝에 '미트 앙트레메지'(분업화된 주방엥서 채소와 곡물류를 담당하는 요리사)가 되어 수많은 조류의 퓌레 만드는 법과 채소를 다루고 익히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하루 종일 퓌레를 만들고 나면 젓가락도 못들 정도였다. 그 이후엔 시체놀이. 블레이를 떠올리면 만감이 교차한다. 내 열정과 한계, 기쁨과 슬픔을 모두 경험했으니. 결국 3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지만 주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푸드 스타일리스트인 셋째 언니, 레스토랑 컨설턴트인 첫째 언니와 의기투합해 서래마을에 그린테이블을 오픈하면서 생각한 메인 요리가 바로 대구 허브브로쓰이다. 건강한 음식이 가득 차려진 식탁을 꿈꾸면서 '그린테이블'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허브의 녹색을 기운을 볼 때마다 유학시절의 꿈과 열정이 다시 느껴지곤 한다. *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3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