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나라, 포틀랜드? 봄이 와서 보이는 것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동화 작가 선현경, 만화가 이우일 부부가 딸과 고양이와 함께 서울 대신 포틀랜드에 머물면서 지내는 얘기. 봄이 온 포틀랜드, 일단 자전거를 샀다.



새로 산 낡은 자전거를 타고 봄바람을 맞는 선현경 작가.




봄이 와서 일단 자전거를 샀다
포틀랜드에 봄이 왔다! 아직은 비가 오는 날이 많지만 겨울처럼 온종일 내리지는 않는다. 비가 잠깐 멈추거나 그러다 해가 반짝 나기도 한다. 날씨가 하루에도 몇 번씩 좋았다가 나쁘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무지개가 자주 보인다. 공기가 좋아서이겠지만 그 무지개가 촌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고 크다. 무지개는 보고 또 봐도 늘 감탄하게 된다. 마법 같다. 꽃이 피고 날이 따뜻해지니 한적했던 길거리가 사람들로 복작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어마어마한 사람들로 강가 공원이 꽉 찰 기세다. 조용한 포틀랜드는 슬슬 사라지고 있나 보다. 봄이 왔으니 자전거가 필요하다. 차 없는 미국 생활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었다. 당연히 차를 제일 먼저 사려고 했었다. 처음 몇 주, 렌터카로 집도 차도 다 알아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오리건 주는 이곳 면허가 없으면 차를 살 수가 없다. 국제면허증이 있어도 오리건 주 면허증을 가지고 있어야만 차를 살 수 있다고 한다. 빌린 차를 반납하고 나서 면허시험을 봐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었다. 근데, 할 일도 많은데 영어로 된 책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매번 세 페이지를 넘기질 못하고 하루가 갔다. 잠깐만, 여기는 포틀랜드다. 대중교통이 좋아 차 없이도 살 수 있는 도시라고 책에서 읽고 왔었다. 트램이나 버스로 어디든 갈 수 있고 자전거 도로가 도시 전체에 다 깔려있다고 했다. 그래, 자전거다.

저렴하고 좋다. 버스엔 앞부분에 자전거를 실어주는 곳이 따로 있다. 트램을 탈 땐 그냥 들고 탈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린 중고 자전거 가게로 갔다. 포틀랜드에서는 대부분을 다 중고로 이용한다. 원래 헌 옷이나, 중고 물품이라면 화장실을 가다가도 참고 구경할 수 있는 나인데 여긴 그런 가게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우린 식기들과 음반들, 그리고 옷들을 거의 빈티지 가게에서 사들였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책상도, 서랍장도 다 중고로 산 물건들이다. 자전거도 당연히 중고다. 파란색 프레임이 날렵하고 예쁜 80년대식 자전거다. 살짝 무거운 게 흠이지만, 딱히 쓸 데도 없는 힘 자전거 드는 데 쓰면 된다. 자전거를 샀으니 ‘파웰의 책방(Powell’s Books)’으로 가야 한다. 집에서 걸어서 삼십 분 거리라 늘 트램을 탈지 말지 고민하던 거리다. 자전거가 생겼으니 당연히 자전거다. 중고 자전거를 끌고 중고 서점에 가서 중고 책들을 구경하다 중고 책들을 산다. 중고의 천국이다.





파웰의 서점에서 산책들. 대니얼 클로즈의 <페이션스>, <첫 유아원 노래 집>, 알렉산더 바렛의 <이것이 포틀랜드다>. 대니얼 클로즈의 <페이션스>는 신간 여행 중인 그에게 직접 사인을 받은 책이고, 아내가 산 <첫 유아원 노래집>은 출간 연도를 알 수 없는 중고 책이다.




중고 세상, 쓰던 물건들의 천국
중고 이야기를 하면 이곳의 자랑거리 파웰의 책방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파웰의 책방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서점’이자 CNN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멋진 서점’이다. 이곳의 역사는 1970년 시카고에서 시작된다. 마이클 파웰이라는 젊은 사람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시카고에 책방을 열었는데, 두 달 만에 그 돈을 다 갚을 정도로 잘 되었다고 한다. 포틀랜드에 살고 있던 그의 아버지 월터 파웰은 은퇴한 페인트업자였는데, 그해 여름 시카고에 아들을 도와주러 갔다가 그 경험으로 1971년 포틀랜드에 헌책방을 열게 되었다. 그러다 이 부자는 포틀랜드에서 함께 헌책과 새 책을 함께 두고 파는 방식의 책방을 하기로 했다. 그 당시엔 새 책과 헌책을 같이 파는 건 다들 미친 짓이라며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시너지 효과를 내 성공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작은 점포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나날이 크기가 늘어나 한 블록 전체가 다 파웰의 책방이다. 지금은 백 만종, 사백 만권의 책을 가지고 있으니 어마어마한 규모로 늘어난 셈이다. 작은 상가가 하나씩 하나씩 연결되고 이어져 지금의 파웰이 된 덕분에 공간이 미로처럼 복잡하다. 층의 높낮이가 모두 다르며, 얼기설기 신기한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 가족 셋은 이곳에 가면 일단 만날 시간을 정해두고 흩어진다. 각자 원하는 곳에 가서 책을 찾고 책을 본다. 남편과 딸은 4층 미술 서적이 있는 곳으로 난 지하 어린이 책 코너로 간다. 난 주로 고전 어린이 동화 코너에서 한 시간 이상을 보내는데, 내겐 여기가 진짜 보물섬이다. 1900년 초반의 책이 있는가 하면 한 선반의 전체가 다 같은 제목인 칸도 있다. 시대별 출판사별 다 각기 다른 하이디와 엘리스, 빨간 머리 앤과 톰 소여가 있다. 책값은 상태에 따라 다른데, 너덜너덜해도 초판이나 저자 사인 본일 경우엔 더 비싸다. 그런 책들을 열어보고 있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기분이 든다. 문득 주위를 둘러봐도 현실감이 생기진 않는다. 수염을 멋지게 염색한 젊은 남자가 요리책을 읽고 있다. 중절모 아저씨가 타탄체크 조끼를 입고 해리 포터를 읽고 있다. 신간 소설을 집어 든 70년대풍 반팔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 팔은 온통 문신으로 뒤덮여있어 긴 소매 옷을 입은 것처럼 화려하다. 결국은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외치며 책방을 나오게 된다. 거리엔 겨울 외투와 비옷을 벗어 던지고 과거에서 도착한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봄바람이 살랑대니 집으로 가기 싫어진다.


다들, ‘포틀랜드는 여름’이라며 여름을 기다린다. 여름은 해도 지지 않고 비도 안 오며 끈적이지도 않는다며 여름을 예찬한다. 해가 살짝 고개만 들어도 이렇게 자꾸 나가고 싶은데, 여름엔 일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지금 바짝 일해 둬야 할 텐데, 왜 자꾸 비는 멈추는 건지. 여름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사우스 이스트 호손 스트리트에 있는 허우스 오브 빈티지. 주로 옷을 취급하지만 다른 자잘한 물건도 많이 취급하는 거대 창고 분위기의 빈티지 옷가게. 아내와 딸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




PROFILE 동화 작가 선현경(@sunny_7008)은 만능 재주꾼으로 지난해 포틀랜드로 긴 여행을 떠났다. 포틀랜드에서도 변함없이 만화가 남편 이우일(@i00111)과 딸 은서(@e_eunseooo), 고양이 카프카를 관찰하면서 별탈 없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동화 작가 선현경, 만화가 이우일 부부가 딸과 고양이와 함께 서울 대신 포틀랜드에 머물면서 지내는 얘기. 봄이 온 포틀랜드, 일단 자전거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