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집 떠나 장기 여행, 에피소드 Ⅰ

동화 작가 선현경, 만화가 이우일 부부가 딸과 고양이와 함께 서울을 떠나 긴 여행길에 올랐다. 매일이 새로운 ‘괴짜’ 도시, 포틀랜드에서 그들이 머물면서 지내는 얘기.

프로필 by ELLE 2016.03.30


 


잠시, 서울을 벗어나기로 했다 

동생 부부가 하와이로 이주했다. 와, 하와이라니.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린 걸까. 그들의 자유로움이 부럽다고 했더니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너희도 가면 되잖아. 뭘 부러워하고 그래? 혹시 속으로는 안 부러운 것 아냐?” “어? 그런가?” 우리 부부의 직장은 집이다. 펜과 종이, 그림 도구 몇 가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 도대체 뭐가 마음에 걸려 떠나지 못하고 그들을 부러워만 하고 있었던 걸까? 딸의 학교야 잠시 휴학하면 되고 살던 집은 빌려주면 된다. 

집을 빌려준 돈으로 원하는 곳에 가서 서울처럼 살 수 있다. 그래, 더 늦기 전에 한번 떠나보자! 인생은 어차피 긴 여행이니까,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살아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하와이로 떠날 생각이었다. “난, 겨울이 없는 곳에서는 살기 싫은데.” 딸이 서운해 하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렇다. 겨울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사계절 중 겨울을 빼놓은 채 살고 싶진 않았다. 

잠깐 살다 올 곳이니 가족 모두가 만족하는 곳이면 좋겠다, 고민하던 차에 어느 날 남편이 뜬금없이 책 한 권을 내밀며 ‘포틀랜드’는 어떻느냐고 물었다. 포틀랜드? <킨포크>의 도시다. 하지만 실체를 전혀 모른다. 가본 적도, 가보려 했던 적도 없는 도시다. 책 속에 나타난 포틀랜드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일단 사계절이 있다. 겨울은 춥지 않고 비가 좀 많이 내린다고 했다. 미국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 특이하게도 소비세가 없는 도시가 포틀랜드라고 했다. 싸게 생활할 수 있겠다. 셋 다 만족한다. 됐다. 가자! 그래서 왔다. 

 


무작정, 별 생각과 기대 없이 포틀랜드에 도착한 것이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걸 우리끼리 해야 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방에서 한 달간 지내면서 1년 머무를 집과 딸이 다닐 학교를 알아보기로 했다. 여행할 때와는 달랐다. 생활하려니 각종 관공서 업무는 물론 은행 계좌 개설까지 모든 걸 새로이 마련해야 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맨땅에 헤딩’이란 말을 매일 실감하며 지냈다. 특히 영어가 어려웠다. 어떻게 된 게 점점 더 들리지 않았다. 고양이를 받아준다기에 어렵게 구한 에어비앤비의 숙소는 스튜디오였다. 너무 좁았다. 한 달 동안 남편과 고양이, 10대 딸까지 모두 한 공간에서 지내는 일은 말 그대로 고문이었다. 화가 나도, 꼴 보기 싫어도 늘 함께 있어야 했다. 화장실에 들어가야만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방 두 개가 이렇게 절실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년간 살 집을 알아보며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왜? 아니 왜, 포틀랜드에 온 거니?”다. 그러게 말이다. 대체 왜 우린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서울엔 집도 있고 차도 있다. 내가 돌봐야 할 나무와 내 방, 내 그릇도 있다. 여기에 오니 식기는커녕 젓가락도 없다. 모든 걸 새로 구하고 찾아내야 한다. 그것도 영어로. 그런데 왜 우린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서울에서도 우리 가족은 충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낯선 땅에서 생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포틀랜드에 와서야 자문하게 됐다. 왜 나는 여기에 온 걸까? 고여 있는 물 같은 느낌이었다. 편안한 곳에서 흐르는 대로 지내다 보면 썩을 것 같았다. 변한지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살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달려 나왔다.

 


날마다 하나씩 새로운 ‘괴짜’ 도시 

포틀랜드 사람들의 첫인상은 너무 친절하다는 거다. 처음 도착한 날이었다. 마트 계산대에서 할인 카드가 없다고 하니 내 뒤에 줄을 서 있던 생판 모르는 사람이 자기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 없이 사면 너무 손해라며 ‘씨익’ 웃는다. 그러자 계산대 직원이 다시 한 번 웃는다. “그 카드 덕에 넌 지금 14달러를 아끼게 됐다.” 나는 14달러를 누군가에게 돌려줘야 하는 건지 잠시 머뭇거렸다. 

며칠 후, 셋이서 렌터카를 타고 가다 길 옆에 차를 세워둔 채로 잠시 지도를 보고 있을 때였다. 길 반대편에서 강아지와 산책하던 모르는 언니가 길을 건너와 어딜 찾는 거냐고 물었다. 몰랐던 길을 상세하게 가르쳐줬다. 친히 길까지 건너와 묻기도 전에 방향을 알려주다니, 그 언니를 데려다줘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또 한번은 우연히 버스에서 만난 내 또래의 여자가 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내 스카프를 수줍게 칭찬했다. 내가 염색한 허접한 스카프였다(심지어 식구들은 거지 같다는 반응을 보인!). 그녀와 함께 버스에서 내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갈 땐 나도 모르게 내 스카프를 풀어서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정말 이상한 곳이다. 작은 도시라 그런 걸까(한국에 비해 100배나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선 376km²란 면적의 포틀랜드가 한낱 소도시에 불과하지)? 물론 포틀랜드의 모든 사람들이 호의적이고 친절하다는 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엔 다행히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구해서 살고 있는데, 아직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곳 포틀랜드는 내가 지나쳐온 수많은 도시와는 확실히 좀 다르다. 조금 더 포근하고 조금 더 간지러우며, 조금 더 사람 냄새가 난다. 그래서 이런 질문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왜 여기에 온 거니?” 친구에게나 묻는,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질 수 있는 곳. 예민하게 대답하더라도 들어줄 마음의 자세가 돼 있는 곳, 그런 곳이 포틀랜드다.

 


포틀랜드에는 매년 11월부터 4월까지 거의 매일같이 비가 내린다. 그래서 ‘지옥에서도 오리건 주에서 온 혼백은 싫어한다’는 말이 있다. 1년의 반이 비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라 지옥 불에서도 잘 안 탄다고 말이다. 11월 초, 우리 가족이 도시에 당도할 즈음, 에어비앤비 숙소의 주인은 이제부터 길에서 카누를 탈 정도로 비가 많이 올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예방주사로 들은 덕분에 늘 ‘그 정도는 아닌데?’ 하며, 요사이엔 비에 대해 관대해졌다. 정말 그 정도로 많이 오지는 않았다. 

해가 바뀌고 2월이 되니 해가 나오는 날이 꽤 있다. 근데 여기 사람들은 정말 비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꽤 젖을 정도의 비가 와도 젊은 애들은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날도 쌀쌀해 폐렴에 걸릴 것 같은데도 말이다. 일단 물이 똑똑 떨어지는 ‘물건’이 귀찮고, 그걸 다시 접고 펴는 게 거추장스럽다고 했다. 여기 비는 깨끗하다며, 그냥 비를 맞고 걷는다. 심지어 비를 팔기도 한다. 중고 책과 새 책을 함께 파는 꽤 큰 규모의 ‘파월스 시티 오브 북스(Powell’s City of Books)’란 책방에서였다. 

작고 귀여운 유리병에 ‘포틀랜드 레인(Portland Rain)’이라고 적어 상품으로 팔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까지 팔다니, 자연이 깨끗하긴 한가 보다. 하긴, 뭐 캐나다에선 맑은 공기를 캔에 넣어 판다고 하니(최악의 대기오염 경보가 발령된 베이징에서 불티나게 팔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맑은 공기야 들이마시는 용도로 쓰이는 거겠지만 포틀랜드 비는 대체 뭐에다 쓸 수 있는 걸까? 나도 나가서 빗물을 받아 모아둬야 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요상한 생각이 절로 생기는 곳이 포틀랜드다.

 

 

PROFILE 동화 작가 선현경(@sunny_7008)은 만능 재주꾼으로 지난해 포틀랜드로 긴 여행을 떠났다. 포틀랜드에서도 변함없이 만화가 남편 이우일(@i00111)과 딸 은서(@e_eunseooo), 고양이 카프카를 관찰하면서 별탈 없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Credit

  • ILLUSTRATOR 이우일
  • WRITER 선현경
  • EDITOR 김나래
  • ART DESIGNER 조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