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나 장기 여행, 에피소드 Ⅰ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동화 작가 선현경, 만화가 이우일 부부가 딸과 고양이와 함께 서울을 떠나 긴 여행길에 올랐다. 매일이 새로운 ‘괴짜’ 도시, 포틀랜드에서 그들이 머물면서 지내는 얘기.::포틀랜드,pertland,pdx,커피,맥주,재즈,서울,여행,작가,부부,에세이,미국,선현경,이우일,만화가이우일,포틀랜드여행,여행,엘르,엘르걸,elle.co.kr:: | 포틀랜드,pertland,pdx,커피,맥주

  잠시, 서울을 벗어나기로 했다  동생 부부가 하와이로 이주했다. 와, 하와이라니.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린 걸까. 그들의 자유로움이 부럽다고 했더니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너희도 가면 되잖아. 뭘 부러워하고 그래? 혹시 속으로는 안 부러운 것 아냐?” “어? 그런가?” 우리 부부의 직장은 집이다. 펜과 종이, 그림 도구 몇 가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 도대체 뭐가 마음에 걸려 떠나지 못하고 그들을 부러워만 하고 있었던 걸까? 딸의 학교야 잠시 휴학하면 되고 살던 집은 빌려주면 된다.  집을 빌려준 돈으로 원하는 곳에 가서 서울처럼 살 수 있다. 그래, 더 늦기 전에 한번 떠나보자! 인생은 어차피 긴 여행이니까,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살아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하와이로 떠날 생각이었다. “난, 겨울이 없는 곳에서는 살기 싫은데.” 딸이 서운해 하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렇다. 겨울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사계절 중 겨울을 빼놓은 채 살고 싶진 않았다.  잠깐 살다 올 곳이니 가족 모두가 만족하는 곳이면 좋겠다, 고민하던 차에 어느 날 남편이 뜬금없이 책 한 권을 내밀며 ‘포틀랜드’는 어떻느냐고 물었다. 포틀랜드? <킨포크>의 도시다. 하지만 실체를 전혀 모른다. 가본 적도, 가보려 했던 적도 없는 도시다. 책 속에 나타난 포틀랜드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일단 사계절이 있다. 겨울은 춥지 않고 비가 좀 많이 내린다고 했다. 미국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 특이하게도 소비세가 없는 도시가 포틀랜드라고 했다. 싸게 생활할 수 있겠다. 셋 다 만족한다. 됐다. 가자! 그래서 왔다.    무작정, 별 생각과 기대 없이 포틀랜드에 도착한 것이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걸 우리끼리 해야 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방에서 한 달간 지내면서 1년 머무를 집과 딸이 다닐 학교를 알아보기로 했다. 여행할 때와는 달랐다. 생활하려니 각종 관공서 업무는 물론 은행 계좌 개설까지 모든 걸 새로이 마련해야 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맨땅에 헤딩’이란 말을 매일 실감하며 지냈다. 특히 영어가 어려웠다. 어떻게 된 게 점점 더 들리지 않았다. 고양이를 받아준다기에 어렵게 구한 에어비앤비의 숙소는 스튜디오였다. 너무 좁았다. 한 달 동안 남편과 고양이, 10대 딸까지 모두 한 공간에서 지내는 일은 말 그대로 고문이었다. 화가 나도, 꼴 보기 싫어도 늘 함께 있어야 했다. 화장실에 들어가야만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방 두 개가 이렇게 절실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년간 살 집을 알아보며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왜? 아니 왜, 포틀랜드에 온 거니?”다. 그러게 말이다. 대체 왜 우린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서울엔 집도 있고 차도 있다. 내가 돌봐야 할 나무와 내 방, 내 그릇도 있다. 여기에 오니 식기는커녕 젓가락도 없다. 모든 걸 새로 구하고 찾아내야 한다. 그것도 영어로. 그런데 왜 우린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서울에서도 우리 가족은 충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낯선 땅에서 생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포틀랜드에 와서야 자문하게 됐다. 왜 나는 여기에 온 걸까? 고여 있는 물 같은 느낌이었다. 편안한 곳에서 흐르는 대로 지내다 보면 썩을 것 같았다. 변한지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살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달려 나왔다.   날마다 하나씩 새로운 ‘괴짜’ 도시  포틀랜드 사람들의 첫인상은 너무 친절하다는 거다. 처음 도착한 날이었다. 마트 계산대에서 할인 카드가 없다고 하니 내 뒤에 줄을 서 있던 생판 모르는 사람이 자기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 없이 사면 너무 손해라며 ‘씨익’ 웃는다. 그러자 계산대 직원이 다시 한 번 웃는다. “그 카드 덕에 넌 지금 14달러를 아끼게 됐다.” 나는 14달러를 누군가에게 돌려줘야 하는 건지 잠시 머뭇거렸다.  며칠 후, 셋이서 렌터카를 타고 가다 길 옆에 차를 세워둔 채로 잠시 지도를 보고 있을 때였다. 길 반대편에서 강아지와 산책하던 모르는 언니가 길을 건너와 어딜 찾는 거냐고 물었다. 몰랐던 길을 상세하게 가르쳐줬다. 친히 길까지 건너와 묻기도 전에 방향을 알려주다니, 그 언니를 데려다줘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또 한번은 우연히 버스에서 만난 내 또래의 여자가 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내 스카프를 수줍게 칭찬했다. 내가 염색한 허접한 스카프였다(심지어 식구들은 거지 같다는 반응을 보인!). 그녀와 함께 버스에서 내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갈 땐 나도 모르게 내 스카프를 풀어서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정말 이상한 곳이다. 작은 도시라 그런 걸까(한국에 비해 100배나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선 376km²란 면적의 포틀랜드가 한낱 소도시에 불과하지)? 물론 포틀랜드의 모든 사람들이 호의적이고 친절하다는 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엔 다행히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구해서 살고 있는데, 아직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곳 포틀랜드는 내가 지나쳐온 수많은 도시와는 확실히 좀 다르다. 조금 더 포근하고 조금 더 간지러우며, 조금 더 사람 냄새가 난다. 그래서 이런 질문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왜 여기에 온 거니?” 친구에게나 묻는,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질 수 있는 곳. 예민하게 대답하더라도 들어줄 마음의 자세가 돼 있는 곳, 그런 곳이 포틀랜드다.   포틀랜드에는 매년 11월부터 4월까지 거의 매일같이 비가 내린다. 그래서 ‘지옥에서도 오리건 주에서 온 혼백은 싫어한다’는 말이 있다. 1년의 반이 비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라 지옥 불에서도 잘 안 탄다고 말이다. 11월 초, 우리 가족이 도시에 당도할 즈음, 에어비앤비 숙소의 주인은 이제부터 길에서 카누를 탈 정도로 비가 많이 올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예방주사로 들은 덕분에 늘 ‘그 정도는 아닌데?’ 하며, 요사이엔 비에 대해 관대해졌다. 정말 그 정도로 많이 오지는 않았다.  해가 바뀌고 2월이 되니 해가 나오는 날이 꽤 있다. 근데 여기 사람들은 정말 비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꽤 젖을 정도의 비가 와도 젊은 애들은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날도 쌀쌀해 폐렴에 걸릴 것 같은데도 말이다. 일단 물이 똑똑 떨어지는 ‘물건’이 귀찮고, 그걸 다시 접고 펴는 게 거추장스럽다고 했다. 여기 비는 깨끗하다며, 그냥 비를 맞고 걷는다. 심지어 비를 팔기도 한다. 중고 책과 새 책을 함께 파는 꽤 큰 규모의 ‘파월스 시티 오브 북스(Powell’s City of Books)’란 책방에서였다.  작고 귀여운 유리병에 ‘포틀랜드 레인(Portland Rain)’이라고 적어 상품으로 팔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까지 팔다니, 자연이 깨끗하긴 한가 보다. 하긴, 뭐 캐나다에선 맑은 공기를 캔에 넣어 판다고 하니(최악의 대기오염 경보가 발령된 베이징에서 불티나게 팔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맑은 공기야 들이마시는 용도로 쓰이는 거겠지만 포틀랜드 비는 대체 뭐에다 쓸 수 있는 걸까? 나도 나가서 빗물을 받아 모아둬야 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요상한 생각이 절로 생기는 곳이 포틀랜드다.     PROFILE 동화 작가 선현경(@sunny_7008)은 만능 재주꾼으로 지난해 포틀랜드로 긴 여행을 떠났다. 포틀랜드에서도 변함없이 만화가 남편 이우일(@i00111)과 딸 은서(@e_eunseooo), 고양이 카프카를 관찰하면서 별탈 없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