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도 <송곳>의 이수인처럼 싸우던 시절이 있었나 군대 가기 전까지. 학교 다닐 땐 위계가 있지 않나. 선배들이 기합을 준다던가. 그럼 싸우게 된다. 동기들과도 싸우고, 후배한테도 욕먹고(웃음).
화가 많았나 보다 제대한 뒤부턴 괜찮았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아서 나를 누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지금도 그런 환경에 들어가면 싸울지도 모르겠다.
군생활은 어땠나 훈련받는 것도, 행군도, 유격도 좋아했으니까. 체질이었지. 제대하는 날까지 어떻게든 영창에 넣으려고 눈을 부라리던 간부가 있긴 했다(웃음).
군대에서도 싸웠나 군대에서 많이 부드러워졌다. 사회에선 내가 저항해도 피해볼 일이 없다. 그냥 싸우면 되지. 군대에선 힘들어진다. 도망칠 곳도 없고. 그렇게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기고만장하게 살았던 게 훌륭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구나. 그래서 ‘신념이란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키는 것’이란 좌우명이 생겼다. 비겁한 태도라고 자학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송곳>은 첫 웹툰이다 장편 연재가 가능한 곳이 웹툰뿐이었다. 시사 잡지와도 논의했지만 시사지 독자에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독자와의 접촉면을 최대한 넓혀야 할 작품이라 생각했으니 웹툰이 나아 보였다. 특히 네이버엔 젊은 독자도 많으니까. 네이버보단 다음에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너무 어울리는 곳에 있어도 이상하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전작들은 개인적인 범주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덕분에 취재랄 게 거의 없었다. 가족 인터뷰 정도(웃음)? 6월 항쟁을 그린 <100℃>는 상대적으로 자료가 많았고.
세계관이 팽창된 만큼 전작에 준하는 밀도를 채우기 위해 캐릭터의 수가 많아야 했을 거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갈지도 모르겠다 <슬램덩크>에선 경기에 출전하진 않아도 항상 등장하는 벤치 멤버가 있지 않나. <송곳>에도 집회활동마다 참여하는 조합원들이 있다. 그런데 <슬램덩크>보다 훨씬 많아(웃음). 그들을 항상 그 모습대로 그려 넣어야 하니 힘들다(웃음).
1부보다 2부 분량이 더 많고, 2부보다 3부 분량이 더 많다. 분량이 늘어나는 건가 조금씩 늘어났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늘어나면 괜찮은데 불안감 때문이라 조심해야지.
불안감? 전달이 제대로 안될 거 같단 불안감. 노조활동이 익숙한 소재가 아니라서 주요 사건만 보여주고 넘어가면 실제 과정이 간과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생겨 점점 세세하게 표현하게 된다.
소재도 익숙하지 않지만 주인공 이수인도 얄짤없는 캐릭터다(웃음) 그래서 두려웠다. 과연 이런 인간을 좋아할까(웃음)? 사실 이수인을 움직이는 동력은 옳고 그름의 문제인데, 재미없잖아. 이런 사람(웃음). 그래서 극 초반에 과거사를 많이 삽입했다. 이수인을 통해 누구나 살아가면서 맞닥뜨릴 법한 상황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군대에 관한 사연이 대부분이지만 사회에서도 사소한 부정을 직면하는 상황은 있고, 그런 부정에 맞서지 못했다 해도 다들 울컥했던 순간은 있었을 거다. 그런 감정을 쥐게 되면 이수인을 따라갈 거라고 생각했다.
이수인만큼 흥미로운 캐릭터는 구고신이다. 노동 문제에 빠삭한 전문가를 그리려면 작가도 그만한 수준이 돼야 할 텐데 기획 초기엔 구고신이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어렵더라. 일단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인물을 그리는 건 어렵다. 내 생각에 스무 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나면 욕했을 거 같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스무 살의 나를 이해한다. 그러니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게다가 나보다 똑똑한 사람을 그리는 건 더 힘들다. 그리고 사회 진보에 대한 열정이 이 인간을 수십 년간 지배한 것인지, 그 사람을 그런 단계까지 닿게 만든 경험이 무엇인지, 지적 자아로서 욕구나 종교적인 열망도 있었던 건지, 그런 걸 설득력 있게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게 내 안에 있다면 그걸 증폭시켜서 만들 수 있겠지만 일단 나보다 나이가 많고, 나보다 똑똑한 인물이니까, 역시 어렵다.
구고신과 이수인은 무림 고수와 제자 같기도 하다. <송곳>은 이수인의 성장 드라마일 수도 있겠다 성장이라기보다 ‘망함’의 드라마(웃음)? 이수인은 계속 망하고 있다. 진급도 물 건너갔고, 회사에서 잘리기 직전이고(웃음).
망함의 판을 짜는 작가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닌 거 같다(웃음). 어쨌든 상당히 심각하고 무거운 소재임에도 캐릭터들은 역설적으로 밝게 묘사되는 것 같다 실제 노조 관계자들은 밝다. 힘들기 때문에 평소에 재미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원래 남자끼리 모이면 서로 웃기려고 애쓰지 않나. 게다가 청소부 할머니 같은 분들이 자신을 신뢰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침울해서야 되겠나.
<송곳>은 까르푸 해고자들의 투쟁 실화를 바탕에 둔 작품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인 실화가 필요했던 이유는 그냥 사건을 만들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수많은 자문을 구해도 이런 사건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예상하기 힘들다. 그래서 실제 사건을 가져다가 외곽에 두르고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왜 까르푸 사태였을까 일단 사건이 천천히 진행돼야 했다. 노동법 얘기도, 노조 조직 과정도, 파업 이전까지 거쳐야 할 과정도 세세히 보여줘야 하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노조 생성 과정은 회사의 초강수로 사람들이 막 잘리면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노조에 가입하고, 당장 파업에 돌입하는 식이다. 폭발적인 과정 안에서 이야기하면 노동법에 명시된 절차가 망가지고, 이야기의 순서도 사라진다. 결국 회사가 노조를 깨기 위해 돈을 쏟아 부을 만큼 처음부터 너무 악랄하진 않아야 했다. 까르푸 사태가 그랬다.
윤리적으로 엄격한 편인가 사소한 부정의에는 관대하다. 물론 한 명을 해친 사람이 100명도 해칠 수 있고, 쓰레기를 쉽게 버리던 사람이 기업의 사장이 되면 공해물질을 배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 사안의 무게가 같은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소한 부정의는 사회에 소속된 개개인의 선으로 통제할 수 있다. 결국 큰 부정의를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는 걸까 노동 문제는 대개 큰 부정의이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는 최악이다. 노동유연화를 시키면 나라가 돈을 번다고 강변했다. 좋다. 그럼 노동유연화 정책으로 비정규직이 돼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축적된 부를 보상해 줘야 하지 않겠나. 분배도 유연화시켜야 되는데 그런 고리는 싹 빼버린다. 누군가만 부자가 되고 누군가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가난한 누군가만 계속 노예처럼 부린다. 이건 우리가 부정한 정책에 동의한 결과다. 그걸 알아야 한다.
만화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냥 그림을 잘 그렸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만화를 그렸다. 대학에 들어갈 시점에 마침 만화과가 생겼고, 적성에 맞을 거 같아 입학했다. 그런데 대학에 다니는 동안 만화계가 완전히 침체됐다. 공모전에 두 번 당선됐고, 잡지에 단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군대에 다녀오니 만화 잡지가 사라졌더라. 연재할 수 있는 만화 잡지가 없고, 웹툰도 없었으니 구체적인 목표라는 게 생길 수 없었다. 그래서 미술학원 강사로 일했는데 한 일간지에서 토요만화 섹션이 마련됐고, 그때 <습지생태보고서>를 연재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어영부영했다면 작가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만화계가 침체된 상황에서 입시만화를 가르치며 후배를 양성한다는 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깝깝했지. 쟤네들 다 뭐 먹고살까 싶고(웃음). 그래도 그때 게임업계가 호황이라 만화과가 다른 과에 비해 취업률이 낮진 않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여러 방식으로 재현하는 거라 잘 배워놓으면 어떻게든 먹고살았다(웃음).
본인도 먹고사는 고민이 있었을 텐데 취직하려고도 했다. 몇몇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미팅까지 했는데 다들 묵묵부답이더라. 평범한 신입사원을 뽑으려는데 나름 업계에선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고, 수상 경력도 있는 사람이라 언제 튀어나갈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투쟁이나 저항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작가라는 인상인데, 이게 작가 입장에선 괜찮을까 어차피 작가라면 무슨 이야기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웃음). 뭐든 잡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작가마다 잡는 게 다른 거지. 개인적으로 작가라면 자기 감정을 긁는 걸 표현해야 한다. 그러니 투쟁이라면 투쟁이고, 저항이라면 저항일 텐데, 최소한 자격이 없는 걸 말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린 시절에 애늙은이라고 불렸다던데 지금은 동년배 중에서 가장 혈기왕성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창작자니까 직장생활 하는 친구들보단 조금 순진하거나 혈기왕성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부정의한 사회 덕분에 <송곳>도 나왔고, 당신도 먹고산다(웃음) 에이, 다른 환경이었다면 더 재미있는 밥줄을 찾았겠지(웃음).
더 재미있는 만화란 <심슨 가족>은 자본가도 까고, 환경론자도 까고, 노조도 까고, 페미니스트도 깐다. 모든 걸 풍자한다. 모든 것을 같은 무게로 다루는 데서 오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노조를 풍자할 순 없잖아. 가뜩이나 왜곡된 인식이 많은 집단이고 여전히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그럴 순 없지. 이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가 갖춰지지 못한 사회에서 그런 건 불가능하다. 깝깝하지.
<송곳>이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나 정치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존재라면 이런 권리가 최우선적으로 다뤄져야 할 문제라는 걸 깨닫길 바란다. 나름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으니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이룰 수 있지 않나. 이런 사안에 관심을 갖고 논의해서 정치가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게끔 만들면 좋겠다.
4부는 언제 시작되나 정확한 날짜는 박지 않았는데 6월 안으로는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