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발칙한 이탈리아 여행기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이탈리아도 일식 열풍이다. 아, 내가 일하던 그 인구 5만의 시골마을에도 일식당이 들어섰으니 말 다했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일식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도시 곳곳에 있는 일식당의 수준이라는 게 도대체 가늠이 안되기 때문이다. :: 이탈리아,여행,푸드,엘르,엘라서울,엣진,elle.co.kr :: | :: 이탈리아,여행,푸드,엘르,엘라서울

Profile박찬일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을 전공하고 잡지 기자가 되었다. 33세 느닷없는 깨우침(!)은 아니었고 돌연 요리에 흥미를 느껴 3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요리와 와인을 공부했다. 시칠리아에서 고수 주방장을 만나 요리사로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뚜또베네’에 이어 ‘트라토리아 논나’를 성공적으로 론칭, 스타 셰프로 이름을 날렸다. 요리와 와인에 대한 쫄깃한 문체의 칼럼니스트로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으며, 현재 이탈리아 향토 요리 ‘누이누이’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다. 그가 쓴 이탈리아 도시와 지방, 주방과 거리를 누비며 보고 느낀 유쾌 발랄 달콤 살벌 이탈리아 여행기를 만나본다. 이탈리아도 일식 열풍이다. 아, 내가 일하던 그 인구 5만의 시골마을에도 일식당이 들어섰으니 말 다했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일식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도시 곳곳에 있는 일식당의 수준이라는 게 도대체 가늠이 안되기 때문이다. 스시라고 해봐야 요리학원 실습생 수준의 캘리포니아 연어롤이 고작이고, 생선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롤은 일식의 정체성을 가진 요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는 정체불명의 요리가 일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식이라고는 거의 배우지 못한 중국인 요리사들이 요리를 하기 때문이다. 요리사라면 주방 풍경을 척 보고 그 정체성도 눈치채기 쉽다. 일식당 간판을 달고는 있지만 일본인 요리사 대신 임금이 싼 중국인을 고용한다. 원래 중국인 요리사들은 무지막지하게 생긴 커다란 사각 칼로 온갖 요리를 다 해내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다른 나라 요리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일식당 주방에서 길쭉한 회칼 대신 넓적하고 커다란 사각칼을 들고 재료를 썰고 있으니 이탈리아 일식당의 정체성은 대개 표시가 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래도 이탈리아인들이 그 사실을 알 리 없고-또는 알아도 아무 상관이 없어서-장사는 잘되는 집들이 많다. 나는 언젠가 이런 사실이 불편해서 입이 간질간했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글쎄, 너희들이 일식당으로 알고 있는 그 집의 요리사들이 누군지 알아? 일본인 좋아하시네. 다들 중국인들이라고. 근데 그게 아니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그런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이탈리아인 친구는 ‘어 그래?’하고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그렇다. 당신 같으면 독일식당의 주방에서 오스트리아인이 일하는지 체코인이 일하는지 알게 뭐냔 말이다. 음식도 그렇다. 한국의 자칭 프랑스식당에서 이탈리아음식을 판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우리에겐 어차피 물 건너 알 수 없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식당에서 파스타를 팔든, 프랑스식당에서 피자를 팔든 우리 눈엔 가락국수나 우동국수나, 그게 그거인 것처럼 말이다. 유럽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탈리아도 마약 문제에 골치를 썩인다. 마약이란 원래 먹고 조신하게 앉아서 철학이나 인생을 논하라고 있는 게 아니어서 꼭 사고를 낸다. 오죽하면 이탈리아에선 오토바이 면허를 내줄 때 마약 검사를 하기로 결정했을까. 거리를 걷다보면 이런 친구들을 만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 어차피 취직해봐야 우리나라의 88만원 세대처럼 쥐꼬리 비정규직이 고작이니, 차라리 놀면서 마약이나 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그 자유로운 영혼을 강조하기 위해 피어싱과 문신을 즐긴다. 혓바닥 피어싱보다 끔찍하지는 않지만 상반신을 100호짜리 캔버스처럼 쓰는 것도 보기 좋은 광경도 아니다. 게다가 마약에 취해서 벌건 눈으로 나같은 여행자들을 노려보는 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한국 같으면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치고 ‘집에들 가 임마’하겠지만-내가 정말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라는 걸 잘 아는 아내는 이런 말을 들으면 노심초사한다-남의 땅에서 그러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사우나에서 ‘형님들’을 만난 것처럼 고개 푹 숙이고 ‘어이, 나카무라’하고 찍자를 붙어도 군소리 없이 제 갈 길을 가야 한다. 이 녀석들은 눈 찢어진 동양인 남자를 보면 나카무라라고 외치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문신을 꽤 좋아한다. 영화 '넘버3'에서 최민식이 깡패들에게 외쳤던 것처럼 '네 몸이 도화지냐. 그림을 그리게’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몸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문신을 새겨 넣는 젊은이들이 많다. 나름 센스 있고 엑조틱한 문신을 즐기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국 문자를 티셔츠나 몸에 새기는 건 어느나라 젊은이나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일인가 보다. 한글은 못 보았지만 한자는 등장하기도 한다. 대개는 사랑 애(愛)자, 용맹할 용(勇)같은 그럴 듯한 글자다. 그런데 어느 문신업자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엉뚱한 글자로 튀어나온다. 훔칠 도(盜)나 망할 망(亡)가 새겨진 한심한 녀석들의 팔뚝을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얼굴이 뻘개질만큼 창피할 일은 아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juicy mountain'이라거나, 'this is free!'라고 씌여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보다는 점잖다. 학교 영어시간에 졸면 결국 성적도 추락하고 성적 이미지 추락하는 셈이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 제 몸에 뭘 새긴다는 게 마뜩찮게 여겨지는 한국에서 문신은 정말 대단한 터부였다. 그래서 몸으로 먹고 사시는 ‘형님’들은 그 세계에 들어서는 첫 번째 낙인으로 과감하게 청색 물감으로 보디페인팅을 하셨던 것이다. 남과 다른 나를 그처럼 적나라하게 24시간 광고할 수 있는 수단도 드물기 때문일 터다. 옛 전사들이-지금도 아프리카나 아마존에서 그러하듯이-적에게 위압감을 주고 스스로 용맹함을 북돋우는 장치로 문신만한 것이 없었던 거다. 우스갯소리로 ‘문신은 형님들이 하는 것이고, 타투는 노는 애들이 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젠 문신이 단순히 혐오감을 주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예술의 자기표현의 단계로 인정받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 친구의 사연을 들어보면 문신(이든 타투든)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젊은 시절, 꽤 잘나가는 형님이었다. 그가 손을 털기로 결심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문신을 지우는 것이었다. 왜 그렇지 않은가. 당신도 저간의 방탕을 손 씻기 위해 머리를 깎았던 것처럼. 그런데 그는 피부과의 레이저 시술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그 시절 전매청의 힘을 빌리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문신은 없어졌지만 그 팔뚝 위에 전매청의 심벌이 아로새겨졌던 것이다. 이건 내가 아는 가장 화끈하고 뜨거운 문신 삭제법이지만, 결코 권장할 일이 못되니 웬만하면 피부과 나 성형외과 신세를 지는 게 좋겠다. 그리고 가능하면 물감을 배합하기 전에 굳은 결심도 필요할 것이다. 문신을 지우는 일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니까 말이다. 여행 중에 가장 괴로운 일은 몸이 아픈 거다. 배고픔이나 향수병 따위야 시간이 해결하지만, 어디가 아프면 이건 대책이 없다. 여기에도 묘한 머피의 법칙이 존재하곤 하는데, 이를테면 ‘에이 설마’하고 약을 준비안하면 그 병이 딱 찾아온다. 내 경우 최악의 병은 설사였다. 설사가 심하면 약도 안 듣는다. 먹은 약이 미처 뭔가 작용을 하기도 전에 변기속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문명국이니 아프면 병원을 찾을 수 있고, 약도 얻어먹을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의약분업이 일찍이 철저해서 약을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파는 약이라야 대충 활명수 수준도 안되는 기묘한 약들일 뿐이다. 최근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나는 지독한 위통과 시달렸다. 심드렁한 약사 아주머니는 이 외국인의 답답한 위를 위해 소화제를 처방해주었다. 아마도 위산이 쏟아져나와 그 보드라운 위벽을 갉아먹고 있을 판국에 위산이 펑펑 나오도록 돕는 약을 처방해 준 것이다! 오래된 얘기지만, 베로나의 어떤 약국에서는 심각한 우울증을 호소하는 내게 카모마일차를 ‘처방’해 준 적도 있다. 카모마일이 우울증을 악화시키지는 않겠지만 복통을 호소하는 환자의 배에 빨간색 옥도정기를 발라주었던 과거의 군대 위생병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약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아마 중병이 들면 의사가 고생께나 할 게 틀림없다. 얼굴에 뾰루지만 나도 약국에서 마구 그 독한 테트라마이신-속칭 그냥 마이싱-을 복용하라고 권유했으니까 말이다. 가벼운 감기에도 먹었던 항생제가 또 얼마였던가. 내 몸속에 차곡차곡 축적된 항생제는 나중에 급한 병에 결정타로 쓰일 항생제의 효과를 반감시켜,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 담배 피우다 죽으면 담배회사를 상대로 소송이나 걸 수 있으련만, 이럴 경우는 어디에 하소연을 할까. 워낙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난 외국의 병원이나 약국 구경도 어지간히 했었다. 병원이나 약국이나 대체로 외국인에게는 카모마일차 수준의 소극적인 진료를 하게 마련이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가운데 함부로 약을 쓰기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진료와 약을 처방받는 경우도 있다. 두어 해 전의 일이다. 나는 이탈리아 반도의 가운데 있는 토스카나를 여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온몸이 몽둥이에 두들겨 맞은 듯이 아프고-누가 슬쩍 스치기만 해도 아팠다-끙끙 앓는 병이었다. 게다가 배에는 우둘투둘한 이상한 반점이 돋아 두려움까지 몰려왔다. 서울에 있는 식구와 통화를 해서 나는 그 병이 대상포진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일종의 바이러스성 질환인데, 과도한 피곤과 스트레스 때문에 일어나는 병이란다. 나는 결국 토스카나 시골의 어느 시립병원 응급실에 처박혔다. 담당 의사는 머리가 새까만 남쪽 출신의 신참이었는데, 이 녀석은 내가 환자라기보다 자기의 인종학적 관심을 충족시키는 모델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온몸을 청진기로 눌러보지 않나, 내 귓속까지 들여다보았다(그래 임마, 귀지 많다 어쩔래). 내 소중한 가운데 부분을 이리저리 들여다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지경이었다. 녀석은 환자를 촉진할 때뿐만 아니라 문진할 때도 아주 독특한 취향을 보여주었다. 환자의 고통을 경청한다기보다 주로 자기가 말을 했는데, 이런 식이었다. “어디서 왔어? 코레아? 남이야 북이야? 미사일? 아니라고? 으흠. 나는 나폴리야. 오 솔레 미오~그래 나폴리. 캄파니아를 안다구? 그래 물소젖 버펄로 모차렐라가 맛있지. 다음엔 꼭 나폴리를 가보기 바래.”다행스러운 건 녀석이 처방은 제대로 해주었다는 점이다. 그의 처방은 캄파니아산 버펄로 모차렐라 치즈 두 덩어리와 캄파니아식 시골 빵 100그램, 베수비오 화산 근처에 만든 멋진 팔란기나 화이트와인 두 잔, 토마토와 가지구이 한 접시…라면 얼마나 좋겠냐만 달랑 일주일치의 알약이었다. 약은 일종의 항 바이러스제인 것 같아서 온몸의 기운이 쪽 빠지게 독했다. 로마로 와서 어느 민박집의 우울한 이층침대에서 이틀을 굴렀더니 대충 병이 나았다. 이탈리아를 워낙 오래 여행하다보니 황당한 일도 자주 겪게 마련인데, 그중의 백미는 이처럼 병원신세 진 얘기가 꽤 많다. 병명도 다양해서 우울증, 대상포진, 독감, 자상(칼에 베여서 생긴 상처)에다가 차마 밝히기 곤란한 ‘거시기’도 있다. 그 거시기는 참 거시기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병원 얘기가 나온 김에 싹 털어놓으련다. 그러니까, 이것도 꽤 오래된 이야기다. 이탈리아 여행 초반의 일이었다. 나는 그때도 시칠리아를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하루는 펜션-이탈리아의 펜션은 한국의 펜션과는 달리 값이 싼 가족경영의 소규모 여관을 말한다-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몸이 퉁퉁 붓고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하루를 기다려도 호전되지 않아 결국 병원을 찾았다. 작은 병원에서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나를 다시 큰 시립병원으로 가도록 조치했다. 여행자에 대한 예우인지, 낡았지만 앰뷸런스까지 태워 보냈다. 시립병원의 응급실 의사는 응급실 소파에 서너 시간이나 방치해 둔 후에야 검진을 시작했고, 결국 그는 아무런 진단도 내리지 못한 채 해당 전문의에게 나를 보냈다. 전문의는 나이가 지긋한 교양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섞어 뭔가를 물어보았지만, 내가 잘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나는 그저 ‘거시기’를 가리키며 통증을 호소했고 소변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진료실 한 구석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는 낡은 커튼을 대충 쳐서 가렸다. 그리고는 내게 돌아서서 바지를 내리라고 명령했다. 나는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그는 친절하게도 직접 자신의 바지를 내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엉겁결에 바지를 내리고 돌아섰다. 엉덩이가 서늘해지면서 나는 거의 절망에 빠졌다. 객지에서 별꼴을 다 당한다는 생각이었고, 역시 밖으로 나다니지 말라는 엄마 말씀이 언제나 옳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내게 다리를 조금 벌리고 허리를 숙이라고 명령했다. 역시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나이가 쉰은 넘었을 배불뚝이 남자 간호사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나의 허리를 굽혔다. 그 순간, 나는 거의 겁탈의 신세계를 체험하고 있었다. 그의 거대한 손이 내 어딘가에 쑥 들어왔던 것이다. 내 몸에서 뭔가가 몽땅 빠져나가는 듯한 아득한 낭패감이랄까, 심각한 굴욕감과 함께 나는 짧게 신음을 뱉었다. 그의 손은 짧은 순간을 내 몸 어딘가에 머물렀는데, 나는 내장이 다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어퍼컷을 하는 것처럼 기운차게 장갑 낀 손을 내 뒤의 어딘가-그래봤자 구멍이 하나밖에 더 있겠어?-로 들이밀었다 다시 나가는 순간까지는 아주 짧아서 십초나 갸웃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기나긴 고통의 독수리요새 한 코스를 지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와 나는 동시에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혀 있었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논체 프로블레마!”아무 문제없어요, 나는 감사하기보단 ‘아저씨, 별일 없을 거면 왜 그러셨어요’하고 진지하게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여전히 내 뒤는 묵직하게 그 침탈의 후유증을 안고 있었고, 나는 우울했다. 나는 그 의사가 극히 정상적인 진료를 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고, 그것은 옳았다. 십수 년이 흘러 지난 겨울, 인천 부평의 어느 비뇨기과에서 나는 똑같은 검사를 치렀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건 이번에는 훨씬 수월하게 일을 치를 수 있었다. 윤활제의 품질 개선이나 나의 뒤가 늙어서 훨씬 헐거워졌기 때문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그건 한국인 의사의 손이 훨씬 작았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이탈리아인 비뇨기과 의사는 거대한 손 때문에 고무장갑을 끼는 게 오랜 시간을 들였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산파가 손으로 받아낸 아이를 둘쯤 둔 산모의 의기양양을 어렴풋이 이해할 정도라고 자부할 수 있다. 그걸 김병만이 말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두 번이나 남의 손을 거시기에 넣어 봤어요? 안 넣어 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다음 호에 연재가 계속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2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