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나의 친구일까, 적일까?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친구가 그러던가? 새로 한 머리가 예쁘다고, 통통해도 찰진 몸이니까 괜찮다고, 오늘 메이크업 잘 됐다고. 그 말을 정말 믿는 건 아니겠지? 그들은 나의 친구(Friend)일까, 적(Enemy)일까? :: 사회적인,스타일,평판,일상,친구,적,엘르,엣진,elle.co.kr :: | :: 사회적인,스타일,평판,일상,친구

단발머리 물결 펌, 일명 김남주 머리를 했다. 굳이 따라하려던 건 아니고 너저분한 긴머리를 일자 단발로 잘랐을 뿐인데 김남주가 됐다. 반신반의하던 미용사는 희열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어머,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리신다.” 친구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상큼하다, 예쁘다, 사랑스럽다, 어려 보인다, 나도 따라하고 싶다, 10년 동안 본 내 스타일 중에서 최고라는 거였다. 심지어 누구는 내게서 나탈리아 보디아노바를 보았다고도 했다. 드디어 난 운명의 헤어스타일을 만난 것이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못생긴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게 한 철저한 외모지상주의자, 어머니를 뵈러 시골에 내려갈 때도 이번만은 자신이 있었다. “꼴이 그게 뭐야? 아줌마 같잖아!” 석 달 만에 만난 어머니는 내가 현관에서 신발도 벗기 전에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그게 시작이었다. “당장 그 파마 풀지 못해? 호적에서 파버리겠어” “같이 나가면 내 친구인 줄 알겠다. 어떻게 그 꼴을 하고 집 밖에 다닐 생각을 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제발 그 머리 좀 어떻게 해주면 안 되겠니?” 어머니는 무려 2주 동안 아침저녁으로 머리 얘기를 했다. 나중엔 노이로제가 걸려 ‘ㅁ’으로 시작되는 단어만 들어도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미용사를 집으로 부르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어머니는 이 중차대한 거사를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 같은 미모지상주의자에 지독한 패션홀릭이자 인정사정 없는 독설가인 막내이모에게 SOS를 요청했다. “뭐? 걔가 아줌마 파마를 하고 집에 왔어? 그걸 내버려둬?” 이웃 도시에 사는 이모는 이미 경북 도민의 20%가 아는 내 유명한 아줌마 파마를 구경하기 위해 과속 딱지를 두 개나 끊어가며 단숨에 달려왔다. 그리곤 진지하게 물었다. “왜 그 머리가 너한테 잘 어울린다고 착각하는 건데?” “일단 이 헤어스타일은 시골에서나 촌스러운 거지 도시에선 최신 트렌드야. 그리고 한두 명이 아니라 무려 스무 명쯤 되는 친구들이 예쁘다고 격찬했어.”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장 시스터스’가 동시에 소리쳤다. “친구 말을 믿어? 이 멍청아!” 그녀들의 지론은 이거다. 친구란 무릇 내가 잘못되길 바라는 무리들이며, 특히 외모에 있어서라면 무조건 그들이 시키는 것과 반대로만 하면 된다. “내 친구들은 안 그래!” “사회생활을 10년이나 했다는 게 아직도 어린애네, 어린애야!” 어머니와 이모는 혀를 끌끌 차더니 곧 바람직한 우정이란 허상에 불과하며 무릇 친구들 간의 경쟁, 암투, 모략, 시기, 질투에서 살아남아야만 진정한 ‘여자’가 되는 거라는 훈시를 한 시간에 걸쳐 늘어놓았다. 이건 뭐, 할리우드 가십 잡지에서 만날 떠들어대는 ‘프레너미’ 이론을 집대성해놓은 것 같다. 결국 난 머리를 풀었다. 며칠 후, 오랜만에 만난 고교시절 친구와 파티에 갔다. “못본 사이에 피부 좋아졌네.” 나의 덕담에 친구는 피식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됐어. 우리도 나이가 있는데 이제 좀 솔직해져야 하지 않겠니?” “그…그래…. 사실 이 나이에 얼굴 탄력 좋아지는 길은 살찌우는 것밖에 없지. 넌 피부와 몸매 중에 피부를 선택한 거지?” “고맙다 이것아. 넌 팔자주름에 시술 좀 받아야겠다. 타이밍 놓치면 필러 넣어도 라인 남는 거 알지?” 서로 마음이 상하지도 낯을 붉히지도 않았다. 본의 아니게 서로의 ‘프레너미’로 지낸 13년 세월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단 1분 만에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의 탑을 쌓았다. 생각해보면 ‘내 사람’들에게 늘 아낌없는 애정을 쏟았다고 자부하는 33년 인생이었지만 그 지극한 애정 때문에 나야 말로 언제나 그들의 프레너미가 되고 말았다. 주근깨 때문에 지저분한 얼굴을 걱정하는 친구에겐 IPL을 권하는 대신 개성 있어 좋다고 했고, 21세기에 샛노란 염색과 울긋불긋한 민낯, 과체중에다 끔찍한 박스 티셔츠를 입고 명동 한복판에 나타난 친구에겐 그런 무심함이 사회생활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지적하는 대신 속세에 물들지 않는 굳은 심지를 칭찬했다. 언제나 세상과 사람을 다 아는 양 잘난 척하며 살아왔지만 인생은 아직도 무궁무진한 깨달음의 연속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숙연해진다. 나의 물결 펌, 혹은 아줌마 파마를 칭찬한 친구들도 실은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장 시스터즈의 일장 연설이 옳았어! 그러고 보니 내가 스모키 아이를 하고 나갔다가 펜더가 됐을 때, 사이즈 맞지 않는 속옷을 입어 가슴이 네 개가 됐을 때, 주제도 모르고 플랫 슈즈를 신어 대공원을 탈출한 인도코끼리처럼 보일 때, 심지어 주머니와 태슬, 징이 주렁주렁 달린 록스타 느낌의 청바지에 등산 점퍼와 통굽 구두를 신고 다닐 때도 누구 하나 내 꼴이 끔찍하다고(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친구, 방금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어. 내게 진짜 친구는 너 하나뿐이야. 앞으로 진실 서약을 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친구가 되지 않겠어!” 새로운 우정의 출발을 기념하며 샴페인으로 건배하는 우리들 앞에 한 무리의 말라깽이 파티 걸들이 밀어닥친다. 팔짱을 끼고 이제 막 파티장에 도착한 그들은 이미 우리가 차지하고 있던 소파에 짐을 부려놓기 위해 기웃거린다. 그 중 말라깽이 1호는 오늘 따라 치마 입는 걸 깜빡한 모양이다. 엉덩이까지 오는 긴 티셔츠에, 레깅스보다는 스타킹에 가까운 불투명한 천조각으로 다리를 휘감고 린지 로한 흉내를 내고 있다. 하지만 예쁘니까 용서된다. 다리도 곧고 길다. 그리고… 엉덩이도 토실토실하다. 그렇다. 티셔츠 혹은 미니원피스 허리춤이 팬티에 살짝 물린 건지, 옷자락이 들려 올라가 계단을 내려설 때부터 아슬아슬하던 뒤태는 그녀가 허리를 구부리는 순간 19금 영상으로 돌변한다. 말라깽이 2호가 우리와 좀 다른 각도에서 말라깽이 1호의 팬티스타킹 사이로 비치는 레이스 속옷을 감상하고 있다. 짐을 부려놓은 1호와 2호는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깔깔대며 일행들이 있는 메인 무대로 나아간다. 1호의 팬티는 여전히 티셔츠인지 원피스인지의 허리춤을 씹고 있었다. “방금 저거 봤어?” 친구가 묻는다. “와~ 저렇게 친한 척하면서 얘기 안해주는 거 봐. 완전 나쁜 X이잖아!” “다른 친구들도 얘기해 주지 않잖아. 다들 자기 친구를 파티의 눈요깃거리로 던져줄 참인가 봐.” “그거네. 프레너미!”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여자 친구들의 칭찬을 믿지 못하는 비뚤어진 인간이자, 남의 스타일에 사사건건 의견과 지적을 늘어놓는 ‘오지라퍼’가 되고 말았다. 어느 후배가 친구의 권유로 코를 세우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장 시스터스의 혼이 빙의된 양 한 시간 동안 설교를 해댔다. 충분히 개성 있고 매력적인 너를 풀빵 틀에 집어넣으려는 인간들 따위와는 의절해 버리라고, 안면 튼 지 한 달도 안 된 후배와 그녀의 십년지기들 사이를 찢어놓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철 지난 바람머리에 지드래곤 풍 아이라인을 그리고 촬영장에 나타난 남자 모델 지망생에게는 이모님 같은 노파심을 발휘해 30분 동안 그루밍 강의를 해줬다. 몇 년 동안 남편 뒷바라지하고 자식 키우느라 아줌마가 다 된 친구에겐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서 팩 정도는 해야지”라고 설교를 퍼부었다.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어느 선배에겐 평소처럼 “피부와 머리결이 좋잖아요.”라고 아첨을 날리는 대신 다이어트를 하고 자세 교정을 받으시라고 권했다. 크리스마스에 만취해서 벌인 일이라 선배의 반응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왠지 앞으로 그녀를 자주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 생활의 유일한 단점이 그거다. 정의를 구현하고 양심의 자유를 얻는 대신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 특히 “너나 잘해!”라는 반격 앞에서는 꼼짝 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친구들이 말한다. “어머, 네가 정말 60kg이야? 그렇게 안 보여!” 달지만 일생에 보탬 안 되는 불량식품 같은 소리다. 믿지도 않는다. “연애할 남자가 없다고? 연애할 남자가 있으면, 그는 네가 맘에 들 것 같아? 솔직히 네가 옷을 좀 막 입는 경향이 있지. 그 옆구리 살은 어쩔 거야? 메이크업도 좀 하고 다녀. 요즘 거울 안 봐? 피부가 썩고 있잖아.” 피가 되고 살이 되지만 기분이 상한다. 이제 인생의 구루로 섬기게 된 장 시스터스에 따르면, 전자 같은 삶을 살되 후자 같은 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신상에 이롭다. 모름지기 나를 긴장시키지 않는 친구는 친구도 아니라고, 그래서 못생긴 사람이나 입에 발린 말만 하는 사람과는 사귀어선 안 되는 거라고 한다. 비록 그들의 연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젠 어렴풋이 세상을 알 것 같다. 요즘 난 나의 아줌마 펌을 칭찬했던 친구, 혹은 프레너미들의 명단을 만들고 있다. 앞으로 그들의 팬티스타킹이 치마를 씹는 걸 봐도 절대 말해주지 않을 거다. *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2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