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또 다른 트렌드 | 엘르코리아 (ELLE KOREA)

디자이너들이 옷 만들기에 지친 걸까. 쓱싹 가위로 잘라 낸 후, 시접 처리 하지 않아 실오라기들이 무성한 옷들을 그냥 내보내거나 반쪽짜리 재킷을 만들었는가 하면, 귀찮은 듯 패턴을 옷핀으로 연결시켰다. 이번 시즌,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파격적인, 유니크한, 엣지있는, 패션쇼, 파티, 모임, 행사, 데이트, 봄, 여름, 질샌더, 팬디, YSL, 엘르, 엘르걸, 엣진, elle.co.kr:: | ::파격적인,유니크한,엣지있는,패션쇼,파티

2009년 9월 25일 밤 8시, 스산한 공기가 감도는 회색의 칙칙한 도시. 잿빛 하늘이 우울한 에너지를 마구 뿜어대는 밀라노가 싫지만은 않은 건 질 샌더가 밀라노 패션 위크 스케줄에 리스트업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 샌더만의 장기인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칼같은 재단을 보고 있노라면 삐뚤빼뚤했던 모난 마음도 반듯하게 정리되고, 미니멀한 라인 위를 유유히 흐르는 애시드 컬러를 보면 답답한 가슴도 속 시원히 뻥 뚫리는 느낌이다. 사방이 순백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프레스들을 차곡차곡 앉힌 질 샌더 쇼장의 천장에 설치된 화면에는 헐벗은 남녀가 사막에서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나뒹구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민망한 장면인지라 당당하게 보지 못하고 가끔씩 흘끔거리며 훔쳐봐야만 하는 이 영상을 틀어 놓은 라프 시몬스의 의중이 무엇일까, 이제 얼마 후면 저 틈 사이로 완벽에 가까운 테일러링이 빛나는 그림같은 작품이 쏟아져 나오겠지 하는 상상의 날개를 편다. 드디어 첫 번째 룩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간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로 잰듯 날카롭고 미니멀한 라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라프의 오프닝 룩이 마구 오려낸 듯한 패브릭을 덕지 덕지 붙여놓은 옷이라.... 심지어 다음 옷은 네크라인이 해져 있고 단추를 잘못 채운 듯 재킷의 헴라인이 헝클어져 있었다. 마크 제이콥스가 루이비통 쇼를 앞두고 시즌 야심작인 가방을 완성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나, 쇼 시작 시간이 1시간이나 훌쩍 지났는데도 작업실에서는 아직 옷을 만들고 그 옆에 선 스탭은 손톱을 뜯고 발을 동동 구르며 마음 졸이며 기다리다 옷이 완성되는 대로 오토바이에 싣고 냅다 달려 쇼장으로 옮기는 장면이 담긴 패션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쇼를 준비할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건가?’ ‘어제 아틀리에의 쇼 피스를 도난당해 급하게 다시 만든 것은 아닐까?’ ‘정말 이것이 완성된 거라면 만들기는 편했겠군’ 등등 온갖 추측이 머릿속에서 난무한다. 그 이후로도 올이 풀린 채 끝단을 처리하지 않은 옷들과 튿어진 듯 옆구리가 터져 있는 재킷들이 이어졌고 사막에서 사랑을 나누는 두 남녀의 영상은 계속되었다.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한 채 올을 그대로 방치한 자연스러운 디테일, 성기고 뻣뻣한 린넨 소재, 두툼한 솔은 달아나고 철심만을 힐로 남겨놓은 가장자리가 헤진 펌프스, 그리고 영상 속의 원시적인 두 남녀. 그제서야 관객들은 라프 시몬스가 이야기하고자하는 미완성의 미학, 즉 자연을 담은 날 것 그대로의 룩을 이해하게 된다. 토지 미술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라프 시몬스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라고 운을 뗀 후, 숲을 연상케 하는 짙푸른 그린 컬러와 원시적인 느낌의 에코 소재의 사용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컬렉션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그 문제의 영상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로 자연에 대해 고심한 라프 시몬스의 흔적이었다. 시접을 정리하지 않은, 너무 자연스럽다 못해 옷을 만들다 만 것 같은 상황은 밀란 패션 위크 기간 수 많은 쇼(마르니, CNC 커스튬 내셔날, 안토니오 마라스, 푸치, 저스트 카발리 등등)에서 포착되었다. 인텔리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언제나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보여주는 미우치아 프라다 또한 고급스러운 광택을 내는 더치 새틴과 섬세한 오간자를 가위로 쓱싹 오리고 주욱 찢어 내 거칠게 올이 풀린 옷들을 내보냈고, 소프트하고 에어리한 컬렉션을 완성한 펜디의 칼 라거펠트는 소재의 가벼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끝단을 방치해 실오라기들이 폴폴 날리는 옷에 미완성 버킨이라 불리는 피카부 백을 매치시켰다. 베르수스는 소매와 본판의 패턴을 아예 옷핀만으로 고정시켜 완성품이 아닌 가봉 단계를 보여주는 듯한 스타일링으로 고도의 미완성 트렌드를 이어갔다. 그렇다면 패션의 수도, 파리는 어땠을까. 시접 처리를 하지 않은 옷들은 생 로랑의 컬렉션에도 속속 등장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엘레강스한 엣지 룩을 즐기는 필라티는 밑단이 잘려 속살이 그대로 보이는 버뮤다 팬츠(당장 미싱으로 박아주고 싶은 충동이 이는!)를 만들어냈다. 시크한 스타일링과 컬러 매칭으로 재미를 본 드리스 반 노튼은 이번에 재킷을 입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는데, 재킷의 한쪽 소매에만 팔을 끼워 넣고 다른 한쪽 소매 안쪽에 끈을 달아 백팩처럼 매면 반쪽짜리 재킷을 입은 듯한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아방가르드한 롱 스커트는 집에 있는 커튼을 떼어 내 다리에 둘둘 돌린 후 스테이플러로 툭툭 찍어내 완성 아닌 완성을 한 듯했다. 뉴욕으로 돌아가 알렉산더 왕의 쇼장에도 잠시 들러 보면, 프레야 베하는 한쪽 소매를 잃어버린 듯한 비대칭 피케 셔츠를 입고 있었고 알렉스 걸들이 무릎까지 올려 신은 그레이 타이츠의 뒷부분은 V자로 뚫려 있었다. 필라티가 팬츠 끝단을 잘라냈다면 코어스는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소매단을 잘라냈다. 이 모든 컬렉션을 처음 볼 때는 저게 뭐지? 진짜 다 만든 거 맞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만 클로징 룩까지 유심히 보고 나면 미완성을 고도의 스타일링 컨셉트로 차용해 낸 패션 천재들의 발상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사실 패션 피플만큼 극성스럽고 까탈스러운 부류도 드물지만 일단 트렌드로 인정하면 무한 애정을 쏟는다. 지난 시즌 버버리 프로섬과 프라다에서 제안한 구겨진 옷들만 봐도 그렇다. 세탁기 드럼통에서 갓 빼내 물기만 탈탈 털어낸 듯 마구 구김이 가 있는 상태로 런웨이에 등장한 버버리 프로섬의 트렌치 코트나 프라다 스커트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지 않았나! 만약 심하게 구겨졌거나 끝단의 올이 마구 풀린 옷을 입고 나서기라도 한다면 엄마는 당장 내 몸에서 옷을 벗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팀을 팍팍 뿜어가며 열심히 다리미질해 반듯하게 펴주거나, 칠칠치 못하다고 잔소리 종합 세트를 안겨주며 가위를 들고 나와 삐죽삐죽 내려온 올들을 모조리 잘라버릴 게 뻔하다. 하지만 한번 보면 세상에 그렇게 이상한 것도 없지만 서너번 보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이 바로 트렌드인걸! 이제 우리는 완성과 미완성을 교묘히 넘나드는 이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상황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 자세한 내용은 엘르걸 본지 2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