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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1. FRI

LITTLE DROP OF POISON #1

낮의 향수, 밤의 향수

뜨거운 낮과 깊은 밤의 이야기를 간직한 오 레제르(Eau Legere) by 보테가 베네타


향수는 낮의 향수와 밤의 향수로 구분할 수 있다. 남자 향수, 여자 향수로 구분하는 것보다 더 쓸모 있다. 낮의 향수란 밝고 건조하고 상큼하다. 밤의 향수는 좀 더 진하고 독하고 뭐랄까 지독할 때도 있다. 낮의 향수는 한낮의 소셜 활동을 위해서 뿌리는 것이고 밤의 향수는 물론 밤 외출 같은 것을 위해 필요하다. ‘어떤 향수를 사야 하나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낮용, 밤용으로 나눠서 한 병씩. 이라고 대답한다. 국내에서 잘 팔리는 향수들은 거의 낮의 향수이다. 나의 경우 낮의 향수를 밤에도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면 호기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회사 유니폼을 입고 클럽에 가는 사람 같아 보인다. 그 반대는 사실 아주 나쁘지는 않다. ‘전 어두워지면 주로 집에서 TV를 봐요’ 하는 사람일지라도 밤의 향수 한 병은 갖추는 게 좋다. 잘 때라도 뿌려보면 뭔가 느껴진다. 그렇다면 낮과 밤 둘 다 사용할 수 있는 향수란 없는 것인가?



어느 맑은 겨울 날 나는 도쿄행 비행기를 탔다. 도쿄 시부야에 도착하니 오후 1시였다. 겨울철 오후 1시에 도시 한가운데서 맡을 수 있는 냄새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향을 제대로 맡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습도가 필요한데, 건조하면서도 햇빛은 뜨겁기 때문이다. 이는 햇빛에 수분을 잃은 한낮의 꽃에 향기가 없는 이유와도 같다. 오모테산도를 걸었다. 역시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별다른 향이 나지 않았다. 어느 매장 스탭이 뿌린 가벼운 플로럴 향수 정도가 내 여행의 기분을 살짝 북돋아줄 뿐이었다. 아마도 이런 게 낮의 향수의 역할이겠지.


겨울철의 해는 빨리 저물었다. 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면 식물과 꽃들도 잃어버린 수분을 되찾고 비로소 향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날이 저물자 JR선 하라주쿠역에서 숲의 냄새가 났다. 축축한 풀잎과 곰팡이로 뒤덮인 나무껍질이 섞인 냄새가 풍겼다. 지하철 밖으로 나왔을 때 거리는 어두웠고 불빛은 반짝였다. 나는 다시 오모테산도로 갔다. 그리고 낮 1시에 걸었던 길을 다시 걸었다. 같은 날 같은 길을 낮 1시와 저녁 6시에 두 번 걷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는데 아주 딴 판이었다. 거리에는 퇴근하는 직장인들 사이로 한껏 꾸민 젊은이들이 나타났고, 거리는 이들의 향수 냄새가 가득했다. 어떤 만남에 대한 기대감, 하루의 일과가 끝났다는 안도감, 밤이 주는 유혹 그 자체의 냄새들이었다. 밤의 향수란 이런 것이다. 그 향을 맡으며 그들 사이를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오모테산도에서는 낮과 밤의 냄새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여행을 갈 때마다 낯선 도시의 낮과 밤의 냄새를 수집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구입한 보테가 베네타오 레제르(Eau Legere). 이 향수는 긴 하루 낮과 깊은 밤의 이야기를 모두 담고 있다. 물빛처럼 맑으면서도 검은 가죽을 두른 듯 강렬하고 진한 매력이 있다. 레더(leather) 노트와 시프레(chypre)가 빚어내는 마법이랄까. 오 레제르를 뿌리면 낮에도 밤에도 실패하지 않았다.

이런 향수를 낮밤 공용 향수라고 부른다.



 *시프레 노트(Chypre note)란?  
시프레란 동지중해에 위치한 키프로스 섬(Cyprus)의 불어 표현이다. 향수에서는 시트러스 노트 + 모스 노트 + 애니멀 노트의 골격에 꽃향과 우디 혹은 파우더리를 배합한 향을 뜻한다. 키프로스 섬은 시프레 향조의 주요 골격이 되는 향료들의 산지로 유명했기에 14세기부터 이 특징적인 향료 배합을 ‘시프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프레 노트는 고전적인 품위, 차분함과 모던한 화려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매우 인기가 있는 향조이다.

CREDIT

글 김수향
일러스트 수와
에디터 박해미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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