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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9. WED

EPI. 35 GO ON A HIKE

지리산에 오르다

이것은 초보 하이커의 지리산 산행기. 큰 산을 만만히 여기면 어떤 식으로 큰 코를 다치는지 가르쳐 주는 처절한 교훈담이기도 하다


아래채 민박 손님들이 자주 묻는 것 중 하나. “저기 보이는 저것은 혹시 구름다리인가요?” 아래채 마루에 앉으면 저 멀리 형제봉이 눈에 들어오는데 날이 좋으면 그 곁 어느 봉우리에 걸쳐진 가느다란 다리가 보인다. 나는 전해들은 풍문에 기대어 답하곤 했다. “신선대에 있는 구름다리예요. 실제로 사람들이 건너는 다리라네요!” 거기에서 대화가 끝나면 좋으련만, 사람의 궁금증이란 언제나 한 발 더 내딛고야 마는 법. “혹시 건너보셨어요?” 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아니요.” 대답하며 그 자리에서 얼른 도망치곤 했다.
2년 전 지리산 둘레길을 보름동안 걸었지만 유명한 봉우리에 올라본 적은 없었다. 물론 산 근처에 산다고 해서 모두 그 산을 오르는 것은 아니다. 곁에 있으면 오히려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서울 사람들이 모두 남산에 걸어 올라가본 것은 아닌 것처럼. 모두들 한강 유람선을 타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지만 아무리 변명하고 합리화해도 지리산은 어쩐지 숙제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지난달, 마침내 지리산 가장 남쪽에 있는 최고봉인 형제봉에 올랐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왕초보의 구구절절한 사연이니 등산 전문가께서는 이 글을 피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수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남자친구가 대뜸 관악산을 오르자고 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 나섰다. 그때까지 등산을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발씩 걸음을 옮겨 수십 킬로그램의 몸뚱이를 산 정상에 옮겨놓는 일을 좋아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남자친구의 제안은 왠지 솔깃했다. 힘들 때 손 내밀어주는 장면을 상상해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연약하면서도 때론 씩씩한 면모를 뽐내고도 싶었다. 서로 응원하고 함께 성취를 맛보는 일은 특별한 경험일 테고. 무엇보다 등산 데이트라니 얼마나 클래식하고 낭만적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짐승의 숨소리로 헉헉거렸고 가파른 길을 걸을 땐 거의 네발로 기어올랐고, 내려올 때 쯤 내 몸에선 이전에 맡아본 적 없던 지독한 땀냄새가 진동했다. 공들인 메이크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던 남자친구의 진짜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순 거짓말쟁이였다. 자꾸만 다 왔대.


그리고 지난달, 옛 남자친구는 또 한 번 거짓말 릴레이를 이어갔다. 자혜야 거의 다 온 것 같아. 이젠 땅보다 하늘이 더 많이 보이잖아, 그치? 네가 쉬고 싶으면 좀 쉬어 근데 너 진짜 잘 걷는다. 이제는 남편이 된 거짓말쟁이와 함께 또 다시 짐승의 소리로 헉헉거리며 산을 올랐다. 정상에 다다르기도 전에 허기가 몰려와 아무데나 주질러 앉아 도시락을 펼쳐 먹었다. 그리고 암벽을 타고 벼랑길을 지나 철계단으로 오른 뒤 등산로 입구에서 하나씩 주워 들고 왔던 나무 지팡이마저 무겁게 느껴질 때 즈음 그것이 나타났다. 민박 손님이 아래채 마루에 앉아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그 구름다리. 다리는 생각보다 크고 길었다. 그리고 꽤 흔들렸다. 내 다리도 덩달아 흔들렸다. 힘이 풀린 다리가 양 옆으로 흔들흔들. 숭구리당당 숭당당.


이 코스는 말하자면 초심자 코스. 가장 완만하고 쉬운 길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가. 내려오는 길은 좀 더 수월할 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정상에 거의 다 가서 중년 부부와 마주쳤는데 꽤 전문가처럼 보이던 아저씨의 말씀은 충격적이었다. “저 반대편 노전마을에서 오르는 길은 두시간만에 올라갔었는데, 이 코스가 훨씬 어렵네요. 쭉 오르는 길이 아니고 오르락내리락 올라왔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도 만만찮을 것 같은데...” 저쪽 코스는 비교적 가파르고 빠른 길, 우리가 오른 코스는 좀 완만하지만 오래 걸리는 길. 보통은 저쪽에서 올라와 이쪽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아저씨는 정상에 미처 오르기도 전에 발길을 돌려 내려갔다. 해가 짧아졌으니 조심히 얼른 내려오라는 말과 함께.


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를 힘들게 한 건 숭구리당당 춤을 추는 두 다리가 아니었다. 연골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 같은 두 무릎 때문도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저씨의 말이 씨앗이 되어 내 맘속에 박힌 것이다. 산행시간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해가 지면 우리는 산에 갇혀버릴 것만 같아 두려워졌는데, 그것은 상상 이상으로 거칠고 무거운 감정이었다.


왕복 여섯 시간이라던 길을 우리는 아홉 시간동안 걸었다. 한계에 다다랐을 때 나는 하나의 작전을 떠올렸다. 이름 하여 스무 걸음 작전. 아무리 힘들어도 스무 걸음을 다 걷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오 분 걷고 십 분 쉬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래도 앞으로 가긴 간다. 이것은 삶의 어느 곳에나 적용할 수 있는 나만의 작전이다. 페인트칠이 힘들 땐 다섯 번 칠하고 쉬자 결심하고, 원고가 더딜 때에는 엉망으로라도 두 줄을 쓰고 멈추기로 작정하는 식이다. 이 공식을 적용하면 어떻게든 앞으로 갈 수 있다. 비틀비틀이라도, 멈추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가게 된다.


아무튼 스무 걸음씩 걷다 보니 섬진강 너머 백운산으로 해가 꼴깍 넘어가버리기 직전에 등산을 마칠 수 있었다. 차로 돌아가 시동을 거는 순간 온 사방이 컴컴해졌으니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땅을 밟은 것이다. 깎아지른 듯한 산등성이, 그 누구라도 똑같이 채색할 수 없을만한 색으로 물든 단풍, 산 밑으로 펼쳐진 평사리들판 그리고 저 너머로 유유히 흐르던 섬진강 줄기. 극한의 고통을 제하고 추억해보면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남편은 다음엔 다른 코스로 한번 올라가 보자고 명랑하게 제안한다. 나는 물론 못들은 척 했다. 몸이 힘들어서는 아니고, 자꾸만 다 왔다고 하는 거짓말 듣기 싫어서다. 진짜다.


to be continued...



CREDIT

글 김자혜
에디터 김영재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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