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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0. FRI

EPI. 34 ONE WINTRY NIGHT

생강청을 만드는 밤

계절이 바뀐다 싶으면 옷을 샀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계절에 따라 해야 할 일들이 따로 있다. 이를테면 생강청을 만드는 것과 같은.


코가 시려온다. 고양이는 더 자주 몸을 동그랗게 만들고, 늘 차가운 커피를 마시던 남편은 이제 따듯한 커피를 만든다. 겨울이 온 것이다. 나는 이제 두툼한 양말을 꺼내 신고 아침마다 보리차를 끓인다. 테이블 한 구석에 귤 바구니가 놓이고, 온수매트가 다시 안방으로 입성했다. 등유난로는 아직 창고에 있다. 추위가 더 깊어졌을 때의 즐거움으로 남겨 둔다. 오일장에서 토종 생강을 한보따리 샀다. 작년엔 생강을 편으로 썰어 설탕과 함께 담가두었다가 먹는 ‘설탕 재움’ 스타일로 만들었지만, 올해엔 생강즙으로 만드는 생강청을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생강청 만들기는 생강을 흐르는 물에 박박 씻어 물기를 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 과정이 가장 힘들다. 생강의 껍질을 벗기는 일. 생강의 마디마디 구석을 숟가락으로 칼로 슥삭슥삭. 모두 벗겨 다시 물에 여러 번 씻으면 생강의 뽀얀 속살이 드러난다. 착즙기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이대신 잇몸이다. 뽀얀 것들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믹서에 넣고 곱게 갈아준다. 집에 있던 아이 머리만한 배 한 개 반, 그리고 약간의 물을 넣어 함께 갈아준다. 착즙기도 없는 내가 믿는 것은 남편의 튼튼한 두 팔이다. 면 보자기에 올려 짜고, 또 짜고. 그의 두 팔이 벌벌 떨릴 때 쯤 얻게 된 생강물 한바가지는 몇 시간 그대로 두어 전분을 가라앉힌다. 청을 만들 땐 윗물만 사용한다.


생각해보니 이 집에 살면서 새롭게 시도해본 것들이 많다. 그것들은 대체로 마트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저장식품들. 직접 만들기에는 품이 드는 것들이다. 마당에서 처음 키워본 바질로 만든 바질 페스토, 이집 저집에서 갖다 주신 밤이 너무 많아 만들었던 밤 조림, 무척 싱싱한 토마토를 오일장에서 싸게 팔기에 한보따리 사다가 만들었던 홀토마토, 뒷마당 매실을 따다가 만든 매실청. 그것들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는 두 가지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 그리고 나는 요즘 시간이 많으니까. 그런데 그중 하나는 사실이 아니다. 재료를 사고 다듬고 갈고 끓이고... 재료값과 시간과 가스와 전기와 나의 에너지를 따져보면 사먹는 게 싸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량으로 만드는 공장의 값과 비교하면 그럴 수밖에. 하지만 만들어 먹어보면 또 그게 아니다. 사먹는 것보다 훨씬 더 맛이 좋으니까. 뿌듯함의 맛이랄까 자부심의 맛이랄까. 매년 계절과 함께 돌아오는 일이라는 점 또한 멋지다. 무더위 가시고 나면 바질 페스토, 추석이 지나면 밤 조림, 봄이 가고 여름 냄새가 조금 날 때 즈음 매실청, 이제 겨울인가 싶을 때엔 생강청을 만드는 식이다. 계절과 함께 오는 일은 낭만적인 기분을 동반한다. 매년 만들다보면 실력은 점점 좋아질 테고, 어쩌면 나만의 작은 기술이 생길지도 모르고, 누군가 나의 저장식품을 맛보고는 시간이 꽤 흐른 뒤에 “아! 자혜의 생강청! 그 맛이 그립군!” 하며 추억할지도 모를 일이다.


얘기가 너무 멀리 갔다. 아무튼 다시 생강청으로 돌아가서. 전분을 가라앉히고 윗물만 따라낸 생강즙과 설탕, 올리고당을 커다란 냄비에 붓고 주걱으로 젓는다. 계속 젓는다. 그렇게 몇 시간 휘휘 젓다가 내가 마녀인가 마녀가 된 것인가 정신이 혼미해질 때 즈음 불을 끈다. 열소독한 유리병에 담으니 큰 병 하나 작은 병 하나. 하룻밤 식혀 다음날 아침에 한 숟가락 떠 보니 농도 실패다. 생강청이 아니라 생강엿이 되어버렸다. 아무렴 어떠랴. 뜨끈한 우유에 녹여 우유거품 얹어 마시니 배꼽 밑까지 뜨듯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어디에든 소리쳐 자랑하고 싶은 맛! 코앞까지 다가온 겨울이 반가운 이유가 생겼다. 추워. 추워. 겨울이 너무 싫어! 소리치던 내 마음을 고작 생강청 두 병이 바꿔버렸다니. 왠지 진 것 같아 억울해지는 아침이다.


to be continued...



CREDIT

글 김자혜
에디터 김영재
디자이너 오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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