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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8. FRI

EPI. 31 MOM'S BOOKSHELVES

이야기는 계속된다

서희와 길상이가 뛰놀던 곳, 귀녀가 음모를 품고 용이가 이루지 못한 사랑에 괴로워하던 곳. 소설 <토지>의 배경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곳 하동이다


민박 손님들이 가끔 묻는다. “근처에 둘러 볼만한 곳이 있나요?” 그럴 때면 집에서 차로 오분 거리인 최참판댁을 추천한다. 최참판댁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곳. 소설의 초반, 주인공인 서희와 길상의 어린 시절의 터전이다. 2002년, 드라마 <토지>를 제작하면서 소설 속 집들을 재현해 만들어 놓은 ‘가짜 마을’인 셈이다. 옛 가옥을 구경하며 한가로이 산책하고 주막처럼 꾸며놓은 곳에 앉아 지짐이도 사먹고 몇 가지 관광 상품도 구매할 수 있으니 도시인들에게 소개하기 적당한 관광명소다. 최치수가 머물던 사랑채와 서희가 뛰놀던 별당을 비롯한 열 네동의 한옥 뿐 아니라 서민들이 살던 초가마다 등장 인물들과 그들의 대사까지 적혀있으니, <토지>를 읽은 이에게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곳, 그러나 읽지 않은 이에게는 그저 작은 민속촌에 지나지 않는 곳이다.


지난 봄 어느 날이었다. 최참판댁으로 가는 길에 커다란 목련나무가 있어 목련이 피었는지 보러 잠시 들렀다. 사알 걸어 올라가니, 이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단아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주는 한식 목구조 건물, 박경리 문학관이었다. 지난해 5월에 새로 개관한 이 전시관의 마당에는 박경리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주춧돌에 씌여진 문구,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선생의 유고시집에 수록된 '옛날의 그집' 마지막 문장이었다.



(위)박경리 문학관 전경 (아래)문학관 안에 전시된 박경리 선생의 친필원고.



전시장 안에는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과 사진, 친필 원고 등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한쪽 유리관 안에는 토지를 연재했던 월간지, 그리고 단행본의 시대별 변천사가 진열되어 있었다. <토지>는 1969년에 쓰이기 시작해 1994년 8월에 완성되었다. 26년. 한 인간이 태어나 자립하고도 남을 긴 시간에 걸쳐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연재를 시작했던 <현대문학> 뿐 아니라 <문학사상>, <마당>, <문화일보>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고 지식산업사, 삼성출판사, 솔, 나남 등 여러 출판사에서 단행본이 발행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보았다. 십수년 전 엄마의 책장에서 꺼내 보던 바로 그 책을.


중고등학생 시절,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나 게임기 따위가 없었고, 우리 남매들은 학원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방학이 되면 할 일이 없어 괴로워했다. 지루함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향하게 되는 곳은 엄마의 거대한 책장이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어느 작가의 우울한 작품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책이 허락되었는데, <토지>도 그때 처음 접했다. 수십명의 인물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그들은 모두 억센 사투리를 쓰는데다가 악인들의 악행은 당시의 내겐 너무 충격적이어서 몇 권 읽다가 말았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토지>는 76년에 발행된 초판 버전부터 79년 재판 버전까지의 9권을 82년에 산 것이다. 한 권에 천 오백원이었던 책은 3권부터 이천원으로 값을 올렸다. 손바닥 만한 세로읽기 책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엄마는 갓난쟁이였던 언니를 들쳐 업고 서점에 가 한권씩 사 모았다고 한다. <토지>가 여전히 연재중이던 시절이니, 매번 애타는 마음으로 다음 한권을 기다렸을 것이다. 글쓰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던 문학소녀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포대기를 두르고 동네 책방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앳된 얼굴의 이십대 새댁. 없는 살림에 몇백원짜리 책 한권 사는 것도 사치였을 것이다. 기저귀와 포대기 사이, 생떼와 젖물리기 사이, 그 육아의 전쟁통에서 자꾸만 책을 꺼내들고 이야기에 빠져들었을 나의 젊은 엄마를 상상해 본다.



(위)엄마의 <토지> (아래)나의 <토지>


<토지>의 1부 1권을 샀다. 2012년에 완성된 결정판이다. 전집을 한번에 구입해 짜잔, 하고 진열하는 것이 나의 원래 성질에 더 맞는 일이지만, 마치 연재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한 권 다 읽으면 또 한 권. 어쩐지 그 시절의 엄마처럼 해보고 싶었다.


지리산 형제봉과 구재봉 줄기가 두 팔을 벌려 포근히 감싸고 있는 모습을 한 평사리 들판, 그리고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자연은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화개장터와 하동읍, 섬진강 백사장, 송림, 아직 흔적이 남아있는 하동포구 등을 떠올리면 소설 속 장면들이 그림을 그린 듯 생생히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 마을의 노인들은 소설 속 인물들과 같은 말씨를 사용하니, 어쩌면 이 동네 어딘가에 그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니 내 인생에서 이 책을 읽을 적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가.


to be continued...

CREDIT

글 김자혜
에디터 김영재
디자이너 오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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