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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2. THU

EPI. 28 AFTER THE RAIN

가뭄 끝에 비가 내린다

땅이 쩍쩍 갈라지고 농부들의 한숨이 깊어진다. 가뭄이다. 긴 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면 온 동네가 고요해진다. 온갖 풀이 내지르는 즐거운 비명만 가득하다


지난 주 어느 날 오후, 읍에 있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대중목욕탕은 십 수년 만이었다. 탕 안에는 온통 노인들, 온 몸의 살과 피부로 중력의 존재를 증명하는 할머니들뿐이었다. 목욕관리사가 새빨간 브라를 입고 손바닥을 탕탕 마주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도 희끗했다. 내 몸 여기저기에 와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모른척하며 후다닥 씻고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20분 남짓. 공중목욕탕에 몸을 담그는 것을 즐기지 않는 나는 가벼운 샤워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집 수도 수압에 문제가 있어 3일 동안 씻지 못한 탓이었다. 상수도가 닿지 않는 우리 마을은 지리산에서 흘러오는 물을 사용하는데,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으면 마을 물탱크의 물이 바닥나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일년에 한두 번 벌어지는 대참사. 아래채에 민박 손님이라도 있는 날에는 전전긍긍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많다. 위채에 비해 수압이 높아 손님들이 씻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도 내 마음은 편치 않다. 문득 다시 실감한다. 나는 지금 비가 내리지 않으면 씻지 못하는 마을, 깡시골에 살고 있다.


몇 주 만에 비다운 비가 내리고 있다. 마당을 둘러보러 잠시 나갔다가 식물들이 행복해 내지르는 비명을 들었다. 나무나 꽃, 들풀도 제 있는 힘껏 자신의 기분과 상태를 표현한다는 걸. 나는 시골에 내려와서 처음 깨달았다. 식물의 비명을 들을 수 있는 재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한동안 가물었다가 간만에 비 오는 날,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누구나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평소 그 나무를 자주 관찰한 사람일 것, 그리고 누구보다 단비를 기다린 사람일 것.


가물어 온 동네가 버적버적 말라가는 날 동안 나는 부지런히 물을 날랐다. 아파트에 사는 이들처럼 수돗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산에서 오는 물을, 그것도 지리산이 베풀어준 물을 뿌려주는 것이니, 빗물과 다를 것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 얕은 믿음이 틀렸다는 것은 비 내린 다음날 증명된다. 온 세상 식물들이 새 생명을 얻은 것처럼 기지개를 펴고 단비를 반기는 장면은, 놀라움을 넘어 어떤 배신감마저 느끼게 한다. <말괄량이 삐삐(삐삐 롱스타킹)> 중 한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꽤 귀여운 장면. 비가 많이 오는 날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삐삐를 보고 지나가던 친구가 묻는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왜 꽃에 물을 주는 거야?” 그러자 삐삐가 답한다. “어젯밤 이 일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몰라. 비가 온다는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진 않을 거야!” 어떤 자기개발서는 이 장면을 인용해 자신이 즐기는 일, 하기로 결심한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독려한다. 그런데 어쩌니 삐삐야, 네가 틀렸단다. 나무는 네가 주는 물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백배는 더 좋아해!


따지고 보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더 많은 영양이 있을 리 없다. 지하수에는 토양중의 유기물과 무기물이 용해되어 다양한 성분이 포함되어있을 수 있지만 빗물은 순수한 증류수에 가깝다. 깨끗하면 그나마 다행이지, 공기오염 물질이 용해되어 산성비로 변할 위험마저 도사린다. 그런데도 땅이 빗물을 좋아하는 건 왜일까. 논이건 밭이건, 꽃이 만발한 화단이건 잡초로 가득한 버려진 땅이건, 온 땅에 공평하게 내리기 때문이 아닐까. 비 오는 것을 한참 구경하다가 아차 싶어 아래채 지붕에 달린 빗물받이 끄트머리, 빗물이 줄줄 흐르는 곳에 물뿌리개를 가져다 둔다. 빨간 물뿌리개에 빗물을 가득 받아 화단의 가장 안쪽, 처마 밑에 있는 라벤더에 뿌려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비가 내려도 닿지 않는 곳에 꽃을 심어둔 것이다. 이 즐거운 빗물파티에서 홀로 제외된 라벤더에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내가 초보라서 그런 거니까 네가 조금 이해해주라.


고마운 단비 내린 날, 방울토마토 꽃이 피었던 자리에 열매가 맺힌 것을 발견했다.


to be continued...

CREDIT

글 김자혜
에디터 김영재
일러스트 김참새
디자이너 오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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