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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6. TUE

TRIP WITH STRANGERS

낯선 이들과 친구처럼

2018년을 새롭게 맞이하고 싶어 시드니로 떠났다. 혼자서 외롭지 않게, 현지인처럼 여행하는 방법

나이 앞자리가 바뀌는 새해는 뭔가 특별하게 맞이하고 싶었다. 마치 다가오는 10년이 바로 이날 하루에 달린 것 같았으니까. 작년, 또 그 작년처럼 새해를 맞는 각오나 조금의 설렘도 없이 그렇게 시시하게 맞으면 향후 10년이 망가질 것 같았다. 그래서 떠났다. 2018년의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불꽃놀이가 유명하다는 호주 시드니로 말이다. 물론 새해를 함께 맞이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시간을 맞추고 멤버를 구성하느라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지친 경험이 몇 번 있었다. 이번엔 혼자서 호기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아줌마라 불릴 나이가 됐어도 몸매 외에는 딱히 아줌마적 호기심, 말하자면 주변 모든 사람의 일상다반사에 대한 시시콜콜한 관심은 없는 편이라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새 친구를 만들기는커녕 말 한번 제대로 걸 수 있을까 두려웠다. 옆에 누가 있으면 신경이 꽤 많이 쓰이는 편이라 싱글 트립을 선호하면서도 종일 수다를 떨 상대가 아무도 없으면 기분이 처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를 중심으로 자정에 이루어지는 새해맞이 불꽃놀이(New Year Eve Fireworks)는 이를 보기 위해 전날부터 명당에 텐트를 치고 노숙할 만큼 인기가 있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다. 이곳에 친구 한 명 없는 내가 어디서 누구랑 볼 것인지, 혼자서 그 긴 시간을 도저히 버틸 수 없을 텐데 어쩌지. 호기롭던 계획이 점차 불안해질 무렵, 구원의 손길은 바로 에어비앤비(Airbnb)의 트립이었다. 에어비앤비는 숙소로는 이용해 봤으나 현지인이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있다니! 두 시간에서 종일까지 투어 일정이 다양하고, 요리와 와인, 박물관 투어 등 일반적인 프로그램도 있지만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는 삶의 방식을 소개하는 투어부터 해변 요가, 참가비가 모두 공익 단체에 기부되는 착한 트립, 수산물 시장에서 해물이나 생선을 골라 바로 옆 공원에서 바비큐 해 먹기, 심지어 결혼식을 하고 시드니 곳곳에서 웨딩 촬영을 하는 투어 등 독특한 프로그램이 많았다. 이 모두가 영어로 진행되지만 자세히 알아듣지 못해도 어떤가. 투어 참여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모인 터라 영어 실력도 제각각이니 대화에 부담이 없다. 무엇보다 좋은 건 혼자 여행 온 사람이 하나둘쯤 있기 마련이라는 것. 아무리 죽고 못 사는 애인 사이라도 함께 사는 건 완전 다른 문제다. 여행을 함께한다는 건 긴장되기 마련인 낯선 경험을 24시간 함께하는 것이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로 몇 시간의 경험을 공유하고, 마음에 들면 그다음 일정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여행 파트너가 가끔은 필요하다. 트립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 결정하기 쉽지 않았지만 와인보다 맥주를 좋아하는 터라 영국인들이 처음 호주에 자리 잡았다는 더 록스(The Rocks) 지역의 펍을 둘러보며 지역 야사를 듣는 ‘더 록스-히스토릭 펍 투어’와 요트를 타고 바닷가 작은 공원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요트 트립을 신청했다. 정원인 열 명이 모두 모였더라면 흡사 수학 여행단 같았을 텐데 투어 인원은 겨우 네 명. 한국인 커플과 런던에서 일하는 포르투갈 출신의 테레사. 시끄러운 펍에서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최적의 숫자였다. 첫 번째 바는 1828년 호주에서 가장 먼저 생긴 펍이라는 ‘포춘 오브 워(Fortune of War)’.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연합군으로 참전해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던 호주 군인들이 마지막으로 술을 진탕 마시고 정신이 혼미한 채로 배를 타고 전장으로 떠났던 곳이다. 슬픈 이야기와 함께 지저분한 이야기도 하나 더. 이곳의 벽 아래쪽은 타일로 마무리되어 있다. 여기뿐 아니라 시드니 곳곳의 건물 안쪽과 바깥쪽 모두 아랫부분이 타일로 마무리된 곳이 많다. 개척지의 거친 남자들이 맥주를 마신 후 바닥에 그냥 볼일을 보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청소가 용이하도록 타일로 마무리했다고 한다. 시드니 펍에 가서 절대 타일 벽에 기댈 일이 아니다. 펍을 나와 더 록스라는 지역 이름이 유래한 장소로 이동했다. 항구에서 도심까지 직선 코스로 수송로를 만드는 일은 무척 험난했다. 바위산을 뚫어 도로를 만들고, 거기서 나온 바위를 다시 가로 70cm, 세로 30cm, 높이 30cm의 커다란 벽돌로 만들어 부근의 건물을 올린 데서 바위(Rock)를 뜻하는 지역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당시 일주일에 20개의 벽돌을 만들어야 했던 죄수들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다른 죄수들의 벽돌을 훔쳤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죄수들이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정을 쪼았는데 그게 각자 달라 색다른 멋을 낸다. 이곳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호주에서 가장 먼저 맥주를 만든 제임스 스퀘어(James Squire) 역시 영국에서 출발한 첫 번째 이주민 수송선(The First Fleet)을 타고 온 강도 전과자였고, 더 록스는 갱과 매춘부들이 모여드는 슬럼이었으며, 비가 올 때마다 오수가 흘러넘쳐 ‘수에즈 운하’라 불리는 골목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말이다.


드디어 2017년의 마지막 날. 오늘은 요트를 타는 날이다. 고급 요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뜨거운 햇빛을 뚫고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니까. 멤버는 모두 커플. 방콕, 뉴칼레도니아, 홍콩, 독일에서 온 커플과 한 시간 정도 바닷바람을 맞으며 로즈베이의 공원에 가서 맛있는 점심을 함께 먹고 반나절 한가롭게 보냈다. 오후가 되고 어제의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어린이들을 위해 저녁 9시에 맛보기로 한 번, 그리고 자정에 성대하게 열릴 불꽃놀이를 기다리며 함께 간식과 식사를 나눴다. 20분가량의 불꽃놀이를 보는 것보다 반나절 가까이 잔디밭에 같이 모여 얘기를 나누고 2017년의 마지막 밤을 함께 지새우며 서로의 새해를 축복해 주는 게 더 재미있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오래 알았던 친구들과 했던 여행도, 가족과의 여행도 기억에 남지만 불현듯 떠날 수 있는 건 역시 홀가분하게 혼자여야 한다. 여행이 다른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라면 현지 사람들이 만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건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 혼자라서 더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다가가 친구를 만들 수 있었고, 그들과 공원에서 노숙하며 맞은 2018년도 다른 어떤 해보다 의미가 있었다. 이제 불현듯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스케줄을 맞추느라 고민하지 않고, 모든 계획이 완벽하지 않아도 가벼운 마음으로 훌쩍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유진

전 <엘르> 편집장이자 무뎌진 호기심을 벼리기 위해, 일상 노동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 무작정 시드니로 떠나 생활 중인 철딱서니 없는 자유생활자.

CREDIT

글, 사진 신유진
에디터 김영재
디자인 오주희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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