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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SUN

MY LITTLE HOLYDAY

고흥으로 훌쩍, 1박2일

남해의 경계와 만나는 작은 마을 고흥은 산과 바다, 책에 둘러싸이기 좋은 곳이다.

‘가고파.그.집’의 새하얀 외벽으로 스며드는 일출


‘가고파.그.집’이 선사하는 풍광


KTX를 타고 순천역에 내려 자동차로 1시간.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로 기억되는 고흥으로 갈 결심을 하게 만든 건 사진 한 장이었다. 새하얀 벽에 난 긴 창을 가득 채운 푸른 바다와 산, 창문 앞 나무 탁자 위에 놓인 원고지를 보며 나 역시 그 장면에 들어가 책장을 넘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진 속 장소에 대해 조금 더 찾다가 알게 된 사실은 이 두 채의 건물은 가족이 귀향 후에 함께 살기 위해 지어졌다는 것, 그리고 ‘가고파.그.집’이라는 이름은 김동진의 동명의 가곡에서 비롯됐다는 것이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가고파라 가고파.’ 가족들이 각자 귀향할 시기를 조율하는 사이, 주인을 기다리는 빈방을 지난해부터 나같이 운 좋은 손님들이 빌려 쓸 수 있게 됐다.  

고흥관광안내도에 따르면 고흥을 여행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다. 제일 인기 있는 ‘거금도권’에는 소록도와 연홍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녹동항이 자리한다. 녹동항이 고흥의 이쪽 끝이라면, 그 반대편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나로도권’이다. 고흥 여행의 계기가 된 집도, 2013년 쏘아 올린 나로호의 흔적인 나로우주센터도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녹동항과 나로도항 두 항구 사이, 여덟 개의 봉우리와 편백 숲을 자랑하는 ‘팔영산권’이 있다. 관광안내도가 나누거나 말거나, 6월의 초여름을 가득 껴안은 고흥은 어디를 가도 초록빛 벌판과 화창한 하늘, 샛노란 금계국이 한결같이 쫓아다닐 뿐이었지만. 순천역에서 내린 뒤 숙소의 반대편, 녹동항으로 곧바로 달렸다. 분식집에서 배를 채우고 찾은 곳은 항구 바로 앞에 자리한 mkr 카페. “스 원두다!” 몇 년 전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원두를 아는 체하자 대표가 반가워하며 말을 건넨다. 호주에서 일하는 동안 멜버른의 커피 문화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아내와 함께 고향 고흥으로 돌아와 카페 문을 열었다고 한다. 고흥 땅에는 떠난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는 엄청난 힘이라도 있는 걸까? 맛있는 플랫 화이트를 맛보고 마음이 느긋해진 김에 지난해에 팔영산 자락에 개관한 분청문화박물관에도 들렀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사이, 150년의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분청사기. ‘이 가락진 멋과 싱싱한 아름다움을 네가 알아본다면 좋고 모른다면 그만이지’라던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평처럼 분청사기의 매력이 뭔지는 전시관을 조금만 돌면 알 수 있다. 박물관 옆에는 마치 별책부록처럼 조정래 작가의 가족문학관이 붙어 있다. 시조시인이었던 아버지 조종현,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아내 김초혜 시인까지 ‘문학 가족’의 작품과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군대에 간 아들에게 부부가 써 보낸 절절한 편지들, 손자와 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할아버지 조정래의 다정한 뒷모습을 담은 사진은 흐뭇한 웃음을 자아냈다.


고향으로 돌아온 대표는 녹동항 앞에 mkr 카페를 열었다.


녹동항 명당만두집은 군만두와 미나리, 당면을 넣은 떡볶이로 유명하다


북 스테이를 위해 이북리더기와 책을 챙겨 왔다


1층 서재에 마련된 필사 공간


고흥의 설화와 문화를 엿보기 좋은 분청문화박물관


“와아!” 숙소에 가까워지면서 바다가 에워싸는 광경에 고조됐던 기대감은 언덕을 오르는 순간 폭발했다. 1층 서재의 풍경, 바위 위에 지어진 독채 앞 벤치에 앉으면 눈에 들어오는 크고 작은 섬. 사진에서 봤던 그대로다! 읽고 싶은 책을 단말기에 가득 담아왔지만, 서재에 꽂힌 책으로도 충분했다. “아들이 책을 좋아해요. 읽던 책들을 가져다 날랐죠.” 고흥 태생인 서정희 대표의 말이다. 그동안 오간 손님들이 선물하거나 두고 간 책들이 쌓인 서재는 남의 집 책꽂이를 훔쳐보는 기분이다. 북 스테이를 신청하면 머무는 동안 읽고 싶은 책을 직접 방에 준비해 주기도 한다. 마침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작가의 책을 발견해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직접 삶았다며 주신 옥수수술빵도 접시 가득 챙겨서 말이다. 거실 통창으로 들어오는 풍경을 바라보자 2차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가족을 위해 지은 곳이기 때문일까, 가구와 소품 하나하나 신경 쓴 흔적이 가득했다. 역시나 길게 난 방의 창문 밖으로는 거실에서 보이던 방향과 반대편의 풍경이 들어온다. 다양한 경치를 조망할 수 있도록 다른 위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이 들어오는 위치를 고려해 창을 낸 덕이다. 책에 집중하기에는 경치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고흥에는 230여 개의 섬이 있다. 그 섬 중 하나였던 내나로도와 외나로도는 1996년 다리가 완성되면서 육지와 연결됐다. 저녁을 먹기 위해 숙소에서 차로 15분 거리인 나로도항에 당도하자 어판장과 마트, 식당이 늘어선 바다마을의 짭짤한 냄새가 코끝을 감는다. 제철을 맞은 서대회 무침을 뚝딱 먹고 다시 숙소로 오는 길. 마침 길었던 여름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저물기 시작했다. 산과 바다, 찰랑찰랑 물을 댄 논 위까지 적시는 새빨간 노을…. 남쪽 끝에서 보낸 하루를 마무리하는 데 이보다 더 완벽한 장면이 있을까? 숙소의 창밖은 어느덧 완전히 깜깜해졌고, 비로소 아까 뽑아 들었던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내일 순천으로 다시 빠져나가는 길에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에 등장했던 보성여관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쪽은 멀고, 그래서 한번 떠나면 갈 수 있는 길들 역시 수갈래로 뻗어 있다. 방금 덮은 책의 마지막 장이 남긴 여운만큼이나 이 여행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며 잠을 청했다.



고흥을 더 보고 싶다면

● 연홍도 아름다운 자연경관 덕에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 불리는 고흥의 미술 섬. 미술관으로 변한 폐교, 벽화와 조형물에서 소박한 아름다움을 느껴보길. 녹동항 신양선착장에서 배로 5분. 

만남의 광장 고흥과 보성의 경계에 자리한 이곳에서는 고흥의 특산품과 기념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유자 향기가 솔솔 풍기는 유자빵은 선물용으로도 훌륭하다.

● 고흥우주발사전망대 해발 50m 지대에 지상 7층 높이로 조성된 전망대. 360도 느긋하게 회전하는 전망 카페는 크고 작은 섬이 가득한 고흥의 경관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다. 월요일 휴무.

CREDIT

에디터 이마루
사진 차혜경
디자인 황동미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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